[통일문화가꿔가기 37] 저우언라이 총리가 추천했던 북 영화로부터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8/05/13 [09:51]  최종편집: ⓒ 자주시보

 

중국의 명인 자오푸추 

 

중국 수도 베이징에는 명인글씨가 쓰인 간판들이 많다. 그 가운데 자오푸추(赵朴初조박초, 1907~2000)라고 밝힌 간판들이 적지 않다. 자오푸추는 사회활동가로서 수십 년 동안 불교계의 지도자로 활약했고 만년에는 중국 서법가(서예가) 협회 부주석직도 맡아 이래저래 이름을 널리 날렸다. 정치계에서는 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 정협 전국위원회 민족과 종교위원회 주임 직에서 중요한 일들을 많이 했다. 중국이 일본과 수교하기 훨신 전부터 일본 불교계와의 교류를 통해 물꼬를 열면서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후에는 한국의 불교계 명인들도 중국에 가면 자오푸추를 만나곤 했다 한다. 

 

▲ 중국의 사회활동가 자오푸추     © 자주시보,중국시민

 

자오푸추는 표준사진에 나오다시피 미소를 머금은 모습이 제일 잘 알려졌다. 허나 결코 그저 자애롭게 웃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1960년대 초반에 중국을 반대하던 소련의 흐루쇼프, 미국의 케네디, 인도의 네루를 싸잡아 날카롭게 풍자한 시들을 통해서도 필요한 경우에는 불교의 “금강노목(金刚怒目, 금강이 눈을 부릅뜬 위엄스러운 모습)”도 갖췄음을 엿볼 수 있다. 

 

저우언라이가 자오푸추에게 추천한 북 영화 《붉은 선동원》

 

종교계 사무를 맡은 자오푸추는 저우언라이(주은래) 총리와 많이 접촉했고 중국 지도자들이 캄보디아, 미얀마 등 불교영향력이 큰 나라에서 온 귀빈들을 만날 때 배석하기도 했다. 

 

▲ 오른쪽으로부터 저우언라이 총리, 자오푸추, 시아누크 캄보디아 국왕     © 자주시보,중국시민

 

만년에 자오푸추는 저우 총리를 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1957년에 나는 또 일본에 갔고 연거푸 몇 번 갔다. 한 번은 일본에서 돌아와 저우 총리를 만났는데 그가 거주하는 시화팅(중난하이 서화청)에서 단독으로 만났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국제 인사들과 교류할 때 다투지 마시오, 얼굴을 붉히지 말고 감화교육을 진행해야 하오. 당신은 최근에 상영한 영화를 보았소? 조선영화인데 한 여성이 한 영감과 마주치는데 영감은 도리를 전혀 따지지 않았소. 여성은 그때 다툰 게 아니라 자신의 행동으로 상대방을 감화시켰소. 그 영화를 나는 끝내 보지 못했는데 후에 듣자니 제목이 《붉은 선전원》이라 했다. 그 시기 우리나라에서는 확실히 밖에 나가 남들과 얼굴을 붉히면서 다툰 사람들이 있었다. 이건 저우 총리가 나에게 진행한 교육이고 가르침이었다.(1957年我又去了日本,接连去了几次。我记得有一次从日本回来见了周总理,单独见的,在西花厅他住的地方。他跟我说,你们跟国际上的人交往不要吵架,不要搞得面红耳赤,应当是进行感化教育。你看到最近放映的一个电影没有?是一个朝鲜电影,讲一个妇女碰到一个老头,他很不讲道理,这个人并没有当时就跟他吵起来,她以自己的行动感化了这个人。这部电影我一直没有看过,后来听说叫《红色宣传员》。那个时候我们确实有人出去跟人家吵得面红耳赤。这是周总理给我的教育,一个教导。)” 

 

 “고금의 재상 업적 그 누가 비기랴(古今相业谁堪比)”는 제목으로 《그대는 이런 사람(你是这样的人)》이라는 저우언라이 회고 구술집에 수록된 글에 나오는 대목이다. 

중국어로 《훙써쇈촨왠(붉은 선전원)》이란 영화는 우리말로 《붉은 선동원》이니 1963년에 제작되었고 그해에 중국에서 번역되었다. 

한편 예술영화의 원작인 연극 《붉은 선동원》은 중국의 유명한 극단이 번역, 공연했는바, 조선(북한)의 연극전문가까지 고문 격으로 청해다가 조선 맛을 살리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1965년에는 상하이 영화촬영소가 연극을 예술영화 《리싼즈(李善子리선자)》로 개작하여 내놓았으니 명배우 장루이팡(张瑞芳장서방)과 장옌(张雁장안)이 주인공 이선자와 낙후한 영감 최진오 역을 맡았다. 

 

▲ 중국 명배우 장루이팡이 주연한 영화 《리싼즈》     © 자주시보,중국시민

 

중국의 조선어교과서에는 늦어서 1980년대 중후반까지 《붉은 선동원》의 대목이 수록되었으니, 노력공수 평가에 불만스러운 영감이 트집 잡으며 화를 내고 주인공이 수모를 겪으면서도 참을성 있게 설득하는 내용이었다. 바로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자오푸추에게 추천한 대목이다. 

 

북에서 말하는 《붉은 선동원》 

 

중국에서 여러 모로 큰 영향을 끼친 《붉은 선동원》에 대해 조선의 자료에서는 이렇게 소개한다. 

 

“《붉은 선동원》

 

연극 7장. 1961년 국립연극단 창조공연. 연출 리서향. 인민상계관작품. 

 

*** ***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 였다. 

 

《《붉은 선동원》을 왜 좋은 작품이라고 합니까? 그것은 이 작품이 우리 농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감동적인 사실을 그대로 잘 그려냈기 때문입니다.》(《김일성저작집》 17권, 110페지) 

연극 《붉은 선동원》은 **** ** 김일성동지의 력사적인 청산리교시를 높이 받들고 투쟁한 농촌작업반의 선동원처녀를 원형으로 하여 창조되였다. 연극은 최진오령감의 아들 관필이와 딸의 약혼문제로 왓던 이웃 마을의 오씨가 마을이 농사도 잘못하고 못산다고 하여 그냥 되돌아가는데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사실을 목격한 작업반선동원 리선육은 *** ***께서 력사적인 청산리당 총회에서 가르쳐 주신대로 사람들과의 사업을 잘 하여 지난날에는 농사가 잘되지 않던 조합을 풍요한 조합으로 만들 것을 결심하고 이악하게 달라붙는다. 그러나 이 고장은 땅이 척박하여 할수 없다고 생각하는 적지 않은 작업반원들은 농사일에 주인답게 참가하지 않는다. 전쟁시기 남편을 잃고 혼자 사는 최복선은 시장에 자주 드나들면서 일하러 나오지도 않는다. 또 고중졸업생인 관필은 농촌생활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도시로 갈 꿈만 꾼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개인리기주의만 부리면서 조합일에는 주인답게 참가하지 않는다. 선옥은 먼저 혼자 살면서 성미마저 괴벽하여진 복선아주머니에게 미국놈들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청년들을 동원하여 집도 꾸려주고 친딸처럼 진심으로 대해줌으로써 그를 개조하여 조합일에 주인답게 나서게 한다. 선옥은 계속하여 자존심이 강하고 개인영웅주의가 심하며 도시생활을 꿈꾸면서 일을 성실하게 하지 않고 자유주의를 부리는 관필에게 그의 취미에 맞는 분공도 주고 날카롭게 비판도 하면서 꾸준히 교양한다. 특히 큰물로 인하여 보둑이 터질때 자기 몸으로 막아내는 희생성을 발휘함으로써 관필을 감화시켜 끝내 그를 교양개조한다. 또한 선옥은 지난날 중농이였으며 일은 겉치레로 하면서도 로력공수에만 눈을 밝히는 최진오령감이 로력평가를 잘해주지 않는다고 하여 꾀병을 하면서 일하러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성의껏 약도 지어다주고 그가 맡은 도급발을 밤을 새워가면서 매줌으로써 그로 하여금 자기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게 한다. 선옥의 이신작칙의 모범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조합원들은 모두가 단합하여 농사일에 힘쓴 결과 작업반농사는 대풍작을 이룩한다. 연극은 웃마을을 현지지도하고 계시는 *** ***을 만나뵙고 온 선옥을 둘러싼 조합원들이 자기들에게 만풍년을 안겨주신 **** ***께 다함없는 감사를 드리며 새해농사를 더 잘 지을 결의를 다지는데서 끝난다. 

주인공 선옥은 *** ***의 청산리교시를 관철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쳐 투쟁하는 공산주의교양자의 전형이다. 그는 *** ***의 청산리교시를 확고한 신념으로 드팀없는 신조로 삼고 모든 것을 다 바쳐 뒤떨어진 사람들을 개조하여 조합일에 열성을 내게 하며 어버이***의 두리에 하나로 묶어세운다. 연극은 선옥의 형상을 통하여 우리 시대의 영웅, 생산혁신자이며 인간개조자인 천리마기수의 훌륭한 성격을 감동적으로 보여주었다. 연극은 또한 복선, 관필, 진오의 개변과정을 통하여 긍정적 모범에 의한 감화교양을 짜고든다면 계급적 원쑤가 아닌 사람은 누구나 다 개조할 수 있다는 심오한 사상을 힘있게 천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연극은 지난날 땅이 척박하여 풍족하게 살지 못하던 땅에서 이루어진 대풍을 통하여 생산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기계나 땅이 아니라 사람들의 사상의식이라는 것 사람과의 사업을 잘하여 모든 사람들을 교양개조하여 *** ***과 당의 두리 에 묶어세운다면 못해낼 일이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연극은 이러한 생활적 화폭들을 통하여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공산주의적 구호 밑에 천리마운동이 힘잇게 벌어지고있는 현실을 감명깊게 형상하였다. 연극은 갈등의 설정과 전개, 그 해결을 비롯한 극구성에서도 작품의 내용과 시대적 미감에 맞는 새로운 측면들을 훌륭하게 보여주었다. 연극에서는 주인공과 갈등관계에 놓여있는 복선, 관필, 진오 등이 일련의 사상적 공통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각기 자기의 개성을 가지고 자기 식으로 생활하고 있는 인물로 그려내고 있을 뿐아니라 낡은 사상 잔재를 가지고 있는 정도와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는 정도에 따라 한 인물씩 개조되게끔 극을 조직하였다. 그러면서 개변된 인물이 그다음 인물의 개변에 영향을 미치게끔 하였다. 이러한 갈등관계의 설정은 우리 시대 부정인물의 성격적 특성, 인간개조사업이 대중자신의 사업으로 전환된 우리 시대의 현실적 특성을 진실하게 반영한 것이다. 연극은 갈등의 설정과 전개에서 부정을 약화시키지 않고 예리화시키면서도 긍정적인 것이 지배적이며 인민대중의 통일과 단결이 사회단계의 기본을 이루는 우리 사회주의현실을 진실하게 그려내였다. 연극의 갈등전개의 심각성과 예리성은 작품의 사상적 심오성을 보장해주고 있다. 연극은 막을 설정하지 않고 7장으로 극을 구성하여 사건의 진행과 극의 흐름에 속도감과 박력을 준것이라든가 복선, 최진오를 비롯한 인물을 훌륭히 개성화한 대사, 1장과 6장의 대비적 구성으로 생활적 변화를 두드러지게 부각한 것을 비롯하여 희곡, 연출, 연기, 미술 등 무대형상의 모든 측면에서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연극창조에서 거둔 혁신적 성과는 작가, 예술인들이 현실에 더 깊이 침투할데 대한 *** *** 김일성동지의 강력적 교시를 높이 받들고 현실에 나가 농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작품을 창조하시는데서 이루어진 것이다. 연극은 같은 제목의 영화로도 제작되였으며 1980년에 《성황당》식으로 재창조되였다.”

 

1980년의 《성황당》식 재창조가 청년 김정일의 뜻에 의해서였으니까 《붉은 선동원》은 2대 수령의 깊은 관심을 받은 것이다. 

 

현실 속의 “붉은 선동원” 

 

선옥의 원형은 평양 교외의 이현리 8작업반에서 선동원으로 일했던 리신자 (1940.4.19~)이다. 1962년 3월에 초판, 1969년 3월에 재판발행된 《인민들속에서 5》에는 리신자가 쓴 글 “《망자골》이 풍년골로 되기까지”(148~ 163쪽)가 실렸다. 

 

▲ 김일성 주석 덕성실기집 《인민들 속에서 5》     © 자주시보,중국시민

 

▲ 《인민들 속에서 5》 150쪽 사진     © 자주시보,중국시민

 

어린 시절 예술화된 형상을 접했던 필자는 뒷날 생활원형 본인이 직접 쓴 글을 보면서 151~ 152쪽에 나오는 아래대목에 무척 흥미를 느꼈다. 

 

“나는 일부 뒤떨어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일하러 나오지 못하는 원인을 료해하면서 일하러 나가자고 이야기하군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농장원들은 아무리 말해주어도 일하러 잘 나오지 않고 오히려 찾아다니는 것을 시끄럽게까지 생각하였습니다. 

화김에 어성을 높여 상대방을 책망해주고 싶은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럴 때마다 꾹 참고 청산리교시와 당정책을 다시한번 연구하였습니다. 그러는 과정에 선동원의 임무를 잘 수행하자면 한 가지 방법만으로 사업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깊이 체득하게 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천리마기수들의 모범을 따라 변변치 못하게나마 힘자라는껏 남을 도와나섰습니다. 

땔나무가 없어 나무하러 가겠다는 사람의 집에는 관리위원회에 제기하여 그것을 해결하여주었고 위생문화사업이 잘 안된 집에는 청년들과 같이 가서 도배도 해주는 한편 그들에게 당정책과 농장의 전망도 해설해주었습니다. 

미숙하게나마 제가 이렇게 일하는 과정에 놀고먹으려는 사람이 적어졌고 모든 사람들이 점차적으로 농장의 일을 자기 일처럼 여기고 일을 성실히 하였습니다.”(151~ 152쪽)

 

▲ 《인민들 속에서 5》 151쪽 사진     © 자주시보,중국시민

 

뒷날 리신자는 협동농장의 경영위원장, 평양시 농촌경리위원회 위원장 등 직을 역임했고 여러 번 대의원으로 선거되었다. 

1950년대나 1960년대의 앞선 사람들이 부딪치고 고민하고 풀어나간 문제들을 접하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기의 옛말을 듣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 허나 인간이 인간을 대하고 다루고 개조하는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질적인 변화가 있을 수 없다. 

1950~60년대 천리마 운동 시기에 모범인물들은 “천리마 기수”라는 칭호를 수여받으면서 사업과 생활의 여러 방면에서 본보기로 꼽혔다. 

 

잘 알려졌다 시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천리마의 10배로 되는 만리마라는 신조어를 내놓았고 만리마운동을 전개한다. 하여 “만리마대고조진군”, “만리마속도창조”, “만리마시대”라는 말이 근년에 조선에서 많이 쓰이고, 모범인물은 “만리마선구자”로 불릴 모양이다. 

참을성 있는 설득과 솔선수범하여 앞장에서 나갔다는 천리마 기수들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만리마 기수들의 모습도 보일 듯하다. 물론 만리마 시대에는 첨단과학기술 장악이 만리마선구자들의 기본조건으로 되겠으니 옛 세대들보다 부담이 더 크기는 하지만, 과학기술이라는 날개를 달면 정말 만리를 날아갈 수도 있겠다. 

 

끝으로 “피비린 숙청”타령만으로는 북 인간들의 참모습을 파악할 수 없고 북 사회의 발전상도 제대로 알지 못함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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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 18/05/13 [11:43]
북의 문학을 친절하게 소개해주어 감사드립니다.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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