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일(한국시각) G20 회의 차 방문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한미정상회담을 진행했다. 통역 외에 별도 배석자도 없이 진행된 단독 정상회담은 주로 대북정책을 논의했으며 크게 세 가지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 첫째는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방문이 한반도 평화정착에 도움이 된다고 뜻을 모았으며, 둘째는 트럼프 대통령이 내년 초 2차 북미정상회담을 추진한다고 밝혔고, 셋째는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를 실현할 때까지 기존의 대북제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언론은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 서울 방문에 대해 미국의 동의를 이끌어 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자신의 승인 없이 독자적인 대북정책을 펴면 안 된다고 강조해온 트럼프 대통령의 언행과 한반도 문제에서 한미공조가 중요하다고 시종일관 밝혀온 청와대의 행보를 감안해보면 이번 합의는 미국이 서울 남북정상회담을 ‘승인’한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서울 남북정상회담을 ‘승인’하였을까? 바로 2019년 북미 핵대결을 피하기 위해서다. 무슨 이야기인지 자세히 살펴보자.
미국은 북핵폐기를 포기했나
6월 북미정상회담까지만 해도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관계정상화는 매우 빠른 속도로 진척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후 합의 이행 과정에서 뭔가 불길한 징조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미국 중간선거를 전후로 북미관계는 완전히 미궁에 빠져버렸다. 미국은 북한에게 핵목록을 제출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고 버텼고, 북한은 약속대로 종전선언을 하라고 다그쳤다. 북미고위급회담은 결렬됐고 누가 대화를 촉구하고 누가 거부하는지도 알 수 없는 혼란이 조성됐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미국의 처지를 고스란히 노출시켰다. 9월 6일 몬태나주에서 열린 공화당 유세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그들이 지금 당장 비핵화를 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인질들을 돌려받았다. 더 이상 미사일 실험도 없고, 더 이상 일본 위를 날아가는 미사일도 없다. 더 이상 핵 실험도 없다”면서 “이에 대해 아무 것도 지급하지 않았다”, “(비핵화) 시간을 충분히 가져도 된다. 제재는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만 놓고 보면 미국은 북한에게서 얻을 걸 다 얻었으니(그것도 공짜로!) 이제는 느긋하게 시간만 보내도 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트럼프 판 전략적 인내’, ‘속도조절론’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북한이 핵실험도 안 하고, 미사일도 안 쏘니 당장 미국에게 위협이 없고, 그래서 괜찮다는 것일까? 또 미국이 ‘먹튀’를 한 것일까?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북한이 실험만 안 할 뿐이지 수소폭탄도 그대로 있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도 그대로 있다. 북한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시험을 재개할 수도, 미국 본토에 핵미사일을 날릴 수도 있다. 그렇다고 북미가 평화협정을 맺거나 수교를 하고 관계를 정상화한 것도 아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전에는 결코 안심할 수 없다.
북미정상회담 한 달 후인 7월 중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비핵화 조치가 더디다며 참모들에게 분통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때만 해도 미국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촉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위급회담, 실무회담을 하면서 자신들이 뭔가 착각한 것을 깨달았다.
당연하게도 북한은 공짜로(?) 비핵화를 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의 대가로 미국은 뭘 줘야할까? 북한을 핵으로 위협하지 않아야 한다.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한 것처럼 ‘핵위협 없는 한반도’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종전선언, 평화협정은 물론이고 주한미군과 북한을 겨냥한 핵무기, 핵전쟁계획, 핵전쟁훈련을 모두 폐기해야 한다. 한마디로 미국이 한반도에서 손을 떼야 한다. 이것 없이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를 하리라고 여겼다면 큰 오산이다.
북한과 비핵화 회담을 거듭하면서 미국은 결국 자신들이 한반도에서 손을 떼기 전에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얻어낼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때부터 미국 내 혼란이 발생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고립주의를 표방하고 있었기에 한반도에서 손을 떼도 상관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북미정상회담 직후 주한미군을 철수하고 싶다고 발언한 것을 보라. 하지만 미국 내에서는 여전히 한반도 패권에 집착을 가진 세력이 다수다. 특히 군산복합체 입장에서 한반도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시장’이다.
백악관에서는 대북정책에 대해 서로 다른 이야기가 뒤섞어서 쏟아져 나왔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현상유지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상황은 미국 뜻대로 흘러갈 수 없었다.
북한의 경고와 미국의 혼비백산
미국이 내부 입장정리를 할 시간을 기다리던 북한은 더 이상 참기 어렵다고 느꼈을 것이다. 사실 북한 입장에서는 기다려줄 이유도 없었다. 애초에 미국이 대화의 자리에 나온 이유가 북한의 핵무력 완성 때문이었다. 주도권을 쥔 북한은 미국을 계속 몰아칠 수도 있었지만 트럼프 대통령에게 정상회담의 길을 열어주어 일정한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미국이 그 기회를 차버린다면 무엇 때문에 참겠는가.
지난 11월 2일 북한 외무성 미국연구소 권정근 소장은 개인 논평을 통해 “미국이 우리의 거듭되는 요구를 제대로 가려듣지 못하고 그 어떤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은 채 오만하게 행동한다면 ...(중략)... ‘병진’이라는 말이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물론 ‘병진’이란 ‘경제-핵 병진’을 뜻한다. 그리고 16일에는 북한 언론들이 김정은 위원장이 새로 개발한 첨단전술무기 시험을 현지지도했다고 보도했다. 북한의 신형 무기가 무엇인지는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원래 공포는 실체를 모를 때 극대화된다.
북한의 새로운 움직임을 보며 미국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북한이 ‘병진’이란 말을 다시 꺼내는 순간 트럼프 대통령의 머릿속은 하얘지고 다리에 힘이 쭉 풀렸을 것이다. 그래도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까지 열어 경제-핵 병진노선을 경제총집중노선으로 전환했으니 설마 북한이 쉽게 병진노선 복귀를 꺼내지는 않으리라 여겼는데...
북한이 병진노선으로 복귀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일단 2017년의 대결이 재현될 것이다. 그런데 2017년 수준으로 끝날까? 당시 북한은 ‘괌 포위사격’, ‘태평양 상 역대급 핵시험’ 등을 언급했다. 이제 북미 군사대결을 다시 한다면 당시에 미뤄둔 것들부터 꺼내들 것이다. 만약 이대로 연말까지 간다면 2019년 신년사에 이런 내용들이 실리고 정초부터 핵미사일이 태평양에 쏟아질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미국에게는 악몽의 2019년이 시작되는 셈이다.
이를 막을 방법은 대화를 재개하는 것밖에 없다. 2차 북미정상회담을 해야 한다. 하지만 2차 북미정상회담을 하면 미국은 뭔가 진전된 약속을 해야 한다. 1차 북미정상회담과 똑같은 이야기를 나누려고 두 정상이 만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북한은 이미 9월 평양정상회담에서 ‘영변 핵시설 폐쇄’를 언급했다. 이에 대해 미국이 해야 할 상응한 조치는 단순한 한미연합훈련 연기 수준일 수 없다.
이야기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정리해보자. 미국은 한반도에서 손을 뗄 수 없으니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요구할 수 없다. 따라서 2차 북미정상회담도 할 수 없다. 미국에게 최선은 북한이 핵·미사일 시험 동결을 한 지금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미국을 가만 놔두지 않는다. 현상유지란 없다. 병진노선 복귀를 해서라도 미국을 기어이 변화시키겠다는 것이다.
이제 2019년은 한 달도 안 남았다. 2019년 신년사에 병진노선 복귀가 담기느냐 마느냐, 시간은 초조하게 흐른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을 사랑한다, 곧 고위급회담을 한다, 2차 북미정상회담 추진 중이다, 립서비스를 날리며 북한의 눈치를 보고 있다. 지난 11월 북미고위급회담 무산 과정에서 확인되었지만 미국 혼자 회담을 하네 마네 호들갑떠는 동안 북한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게 미국의 ‘쇼’였던 것이다.
물론 이정도로 미국은 안심할 수 없다. 그래서 서울 남북정상회담을 ‘승인’한 것이다. 아니 문재인 대통령에게 ‘지시’했을 것이다. 빨리 회담을 열고 신년사에 병진노선 복귀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봐라... 참으로 미국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북미대결에서 수세에 몰려 궁색한 말만 늘어놓는 모습이라니. 그도 모자라 자신의 ‘승인’을 받으라고 호통 치던 한국의 대통령에게 낯부끄러운 지시를 하는 꼴이라니.
4차 남북정상회담의 의제
이제 김정은 위원장 서울 방문과 4차 남북정상회담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언론에서는 12월 중순을 꼽고 있고 청와대도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한편에서는 12월 중순이 무산돼 12월 말로 다시 일정을 잡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정상회담보다 더 주목되는 점은 분단 사상 최초로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대한민국을 방문한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방문은 한국 국민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마지막 분단의 철조망마저 녹여버릴 것이다.
한편 이번 정상회담에서 무엇을 합의할지도 중요하다. 북한 입장에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김정은 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는데 그만큼의 성과를 내려고 할 것이다. 지난 9월 평양정상회담에서 핵심 의제는 군사문제였다. 공동선언 1항도 군사문제였고 부속합의서도 ‘판문점선언 군사분야 이행합의서’였다. 핵심 의제 가운데 남은 것은 정치, 경제 분야다. 그런데 정치 분야에서는 지금 상황에서 크게 합의할 내용을 찾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경제 분야에서 중요한 합의들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한국 입장에서 남북경제협력은 절박한 문제다. 갈수록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제 위기의 돌파구는 남북경제협력밖에 없다. 대기업들도 철도, 도로, 지하자원 등 굵직한 경제협력을 통해 새로운 수익을 창출하는 데 관심이 높고, 중소기업들도 개성공단 등 다양한 경제협력을 통해 활로를 찾고자한다. 문재인 정부도 지지율 하락의 주요 원인인 경제 문제를 해결하려면 남북경제협력이 최상이다.
북한 입장에서 미국과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를 돌파하려면 남북경제협력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남북경제협력은 그 특수성으로 인해 대북제재 예외 인정을 받기 쉽다. 남북철도협력사업도 벌써 예외를 인정받았다. 일단 대북제재 예외가 인정되면 전반적인 대북제재도 급속히 무력화될 것이다.
러시아, 중국 입장에서도 대북제재가 빨리 풀려야 이익을 볼 수 있다. 러시아는 천연가스관 연결 사업과 전력사업 등 오래전부터 한반도를 대상으로 한 경제사업을 구상해왔으나 미국의 대북제재에 막혀 입맛만 다셔왔다. 중국이 사활을 걸고 있는 일대일로 사업 역시 철도, 도로 연결을 통해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 나라들도 남북경제협력을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다.
현재 남북경제협력의 쟁점은 남북교류를 원천 봉쇄한 5.24조치를 해제하는 문제,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을 재개하는 문제, 10.4선언에서 합의한 다양한 경제협력사업에 착수하는 문제 등이다. 이것만 합의해도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러시아 가스관 사업을 확정하는 것도 큰 효과를 낼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미 지난 6월 한러 정상회담에서 ‘남·북·러 3각 협력을 위한 가스 분야 한·러 공동연구’를 추진하기로 합의하였다. 러시아 가스관이 북한을 거쳐 한국까지 오게 되면 천연가스 가격이 거의 3분의 1에서 4분의 1까지 떨어질 수 있으며 동아시아 에너지 물류 지도를 바꾸게 될 것이다. 게다가 가스관 연결은 착공 후 3년이면 완공이 가능해 남북경제협력사업의 1순위로 꼽힌다.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병진노선
남북정상회담의 암초는 여전히 남아있다. 미국은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이 병진노선으로 복귀하지 못하도록 제어하는 것에만 관심 있지 남북관계가 급속히 발전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지난 9월 남북정상회담 결과가 나오자 미국은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미군의 지휘를 받아야 할 한국군이 미국의 ‘승인’ 없이 북한과 과감한 군사 합의를 해버린 것이다. 따라서 이번 서울 정상회담에서도 문재인 정부가 미국의 통제에서 벗어나 한발 앞선 합의들을 하지 못하도록 제어하려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시급히 한미워킹그룹을 설치하고 운영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건 미국의 구상일 뿐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기는 힘들다. 전 세계가 지지하는 남북합의를 미국이 대놓고 파괴할 수 없기 때문이다. 9월 남북공동선언 군사 분야 합의와 철도연결 사업에 대해서도 못마땅하지만 어쩔 수 없이 승인해주었다. 아무리 미국이라도 세계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원래 미국은 세계 여론의 눈치를 보며 움직이지는 않는다. 꼭 필요하다 싶으면 전 세계가 반대해도 밀어붙이는 게 미국이다. 이라크전쟁이 그랬고, 지금의 무역전쟁이 그렇다. 그럼에도 남북합의를 뒤집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북한의 병진노선 눈치는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북한은 경제-핵 병진노선으로 전략핵무력을 완성했고 이 힘으로 미국을 대화의 자리에 끌어냈다. 그리고 올해 4월 병진노선을 경제총집중노선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미국이 적대정책을 폐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틴다면 언제든 병진노선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이걸 잘 알기에 미국은 남북합의를 결정적으로 뒤집을 수 없다. 병진노선은 분명 현재 존재하지 않지만 여전히 미국을 제어하고 있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아내는 꼴이다.
북한이 병진노선으로 되돌아가지 않기를 바라기는 문재인 정부도 마찬가지다. 지금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은 연일 하락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나마 남북관계 발전이 지지율의 버팀목이다. 그런데 북한이 병진노선으로 돌아가 핵·미사일 활동을 재개한다면?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반면 미국을 설득해 대북제재를 유예하고 굵직한 남북경제협력 사업을 합의, 이행한다면 지지율의 발목을 잡는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남북러 가스관 연결에 착수해 3년 후부터 난방비, 차량유류비가 반값으로 떨어진다는 사실만 알려져도 지지율은 고공행진을 할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지금의 위기를 타개할 출로는 남북정상회담 성사에 있다. 당연히 사활을 걸고 매달려야 한다.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위해서는 미국을 설득해야 한다. 다행히 북한이 미국을 설득할 카드를 제공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이 언제든 병진노선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 남북경제협력을 허용해야 하지 않겠냐고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하면 된다. 북한이 제공할 카드를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는 문재인 정부의 실력에 달렸다.
※이 글은 주권연구소와 자주시보에 동시 게재됩니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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