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산지석] 선전이 날겠다는데, 홍콩은 어디로?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9/08/22 [06:16]  최종편집: ⓒ 자주시보

 

[타산지석] 김이 샌 홍콩 시위(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46801&section=sc29&section2=)에서 “17~ 18일 주말 시위가 전보다 규모도 작아지고 격렬성도 약해지리라고 과감히 예언”한 후 조금 긴장했다. 필명 뒤에 숨었으니 고대 예언자들처럼 예언이 빗나갔대서 목이 잘릴 위험은 없지만, 그래도 틀리면 속으로 망신스럽기 때문이었다. 17일 홍콩 정부와 경찰을 지지하고 폭력을 반대하는 대시위가 진행되고 반정부 시위가 별 볼일 없이 끝났지만 뒤에도 일요일이 남았기에 맘을 놓을 수 없었다. 하여 일요일 낮에 행사들에 참가하면서도 자주 모바일로 정보들을 찾아보다가 “이젠 걔들이 별 볼 일 없게 됐구나”고 중얼거렸다. 중국공산당과 국무원이 8월 9일 통과했고 18일 공개발표한 의견서를 보고서였다. 

 

중국 특색 사회주의 선행시범 구역으로 되는 선전 

 

의견서의 제목은 “선전의 중국특색 사회주의 선행시범구역 건설을 지지함에 관한 중공 중앙, 국무원의 의견서(中共中央、国务院关于支持深圳建设中国特色社会主义先行示范区的意见)”이다. 

 

5천자 가까운 의견서에는 전반적 요구, 갖가지 기준 등이 명시되었는데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으나, 이런 의견서가 나왔다는 것은 중국 최고지도부가 선전의 지위를 재인식하고 새로 정하면서 가까이로는 홍콩, 멀리는 타이완(대만)에 이르기까지 내다보고 전략적 포석을 했음을 말해준다. 

 

필자가 홍콩 관련 글들에서 지적했다시피 선전은 오랫동안 홍콩 때문에 발전이 억제되었었다. 비행기 편과 공항부터 시작하여 여러 방면에서 홍콩 자본가들이 중앙에 요구를 제기하면 중앙이 받아들여 선전시 나아가서는 광둥성에서 어떤 일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시키는 순환이 이뤄졌다. 허나 이번의 의견서는 홍콩 자본가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홍콩 평민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선전을 한껏 발전시키겠다는 결심을 보여준다. 

 

최초 보세구역으로 시작하였다가 홍콩, 타이완 기업의 가공공장역할을 해왔던 선전은 산업 형태 전환을 실현한지 오랜데도 홍콩 때문에 손발을 묶였는데, 이번에는 그 자연조건, 경제조건, 인재 여건 등을 한껏 이용하게 됐으니 활개 치며 걷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날개를 달고 날게 되었다. 완전 자유경쟁을 벌인다면 홍콩은 선전 곁의 시골로 변하기 쉽다. 

 

워낙 홍콩이 “일국가 이제도(一国两制)”의 상징과 표본으로서 홍콩이 평화적으로 번영, 발전하면 이제 타이완도 평화적인 수단으로 통일할 수 있다는 게 중국의 그동안 논리였다. 그런데 그런 논리를 악용하고 곡해하여 홍콩이 소동을 벌이면 중앙이 안정유지(중국어로는 웨이원维稳)를 위해 양보하리라고 여기는 홍콩인들이 늘어났고, 요즘 악영향이 극대화되었다. 이번 의견서는 더는 홍콩 자본가들의 눈치를 보지 않겠다는 중앙의 결심을 밝혔고, 가만가만 홍콩 소동을 즐기면서 중앙의 양보를 기다리던 자본가들은 장난질을 해도 성공할 가망이 없게 됐다. 자본주의 논리가 지배하는 홍콩에서 자본가들이 물러서면 결국 민의도 바뀌기 마련이다. 때문에 필자는 수많은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게임은 끝났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 언론들이 숨긴 것 

 

한국 언론들이 국내 시위, 집회를 보도할 때에는 주최 측 추산 인원수 뒤에 괄호를 넣고 경찰 측 추산 인원수를 밝히는 게 관례다. 그런데 홍콩 시위에 관해서는 두 달 남짓이 주최 측 추산 수자만 보도하는 게 새 관례로 되었다. 하여 100만이니 200만이니 운운하면서 홍콩 인구의 몇 분의 1이 참가했다고 호들갑 떨었다. 주말 시위를 주최 측은 워낙 300만이 참가하자고 호소했는데, 18일 시위 후에 170만이라고 공포했다. 예상보다 훨씬 못 미치는 수자이기에 실패로 보아야 할 텐데도, 한국 언론들은 170만을 받아쓰는데 급급했다. 경찰 측 추산 인원수 12만 8천 명이 보도된 기사는 필자가 보지 못했고 단 한 일보사만이 블룸버그사의 보도를 인용하여 12만 8천 명을 언급했다. 수자도 제대로 거들지 않는 기사의 공정성을 어찌 믿을 수 있으랴! 

 

수자 외에도 시위대의 폭행 등등 한국 언론들이 거들지 않은 게 많다. 요즘은 특히 홍콩 반대파들이 외국 여러 도시에서 시위하다가 중국 유학생, 외국 거주 중국인, 화교들의 반대에 부딪친 걸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전날 호주 모 대학에서 쟁론이 벌어졌을 때에는 즉시 보도했던 예에 비춰보면 시위가 성공했을 경우 당연히 보도했을 텐데, 시위들이 참패했으니 거들지 않는가? 

 

사진과 동영상들을 통해 거의 실시로 여러 나라 여러 도시에서의 시위와 반시위 상황이 퍼지고 있는데 웃음이 나온다. 예컨대 독일의 쾰른에서는 경찰이 시위자에게 복면을 벗으라고 요구하여 마지못해 벗는데 그 표정이 하도 절망적이어서 웃음거리로 되었다. 

 

어느 고장에서나 “프리 홍콩”을 외치는 시위자들은 마스크를 낀 데 반해, 중국통일을 주장하고 홍콩 경찰을 지지하는 시위자들은 얼굴을 드러냈다. 호주에서 톈진 말씨를 쓰는 한 사람은 “우리는 얼굴을 드러낸다, 우린 돈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외쳐 큰 박수갈채를 받았고, 세계 각지에서 “짜이커우짜오(摘口罩 마스크를 벗으라)”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분명한 민의의 표현임에도 누군가의 구미에 맞지 않으면 보도도 되지 않는 게 자본주의 언론계의 생리다. 

 

홍콩사태, 민주화 운동인가? 

 

이번 홍콩 사태는 처음부터 서방이 주도하여 “민주화”딱지를 붙였다. 일부 한국인들은 민주를 누리던 홍콩인들이 중공의 통치를 견디기 답답해서 반대투쟁에 나섰다고 미화한다. 허나 영국과 타이완의 명석한 사람들 그리고 중국 대륙의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영국 통치시기에 영국은 홍콩에 민주를 허용하지 않았다. 총독은 항상 영국 왕이 파견했지 홍콩인들의 의사와는 무관했다. 하기에 영국 텔레비전 프로에서 영국인은 홍콩 반대자에게 당신들은 영국도 주지 않은 걸 중국에 요구한다고 반박했다. 중국 대륙에서 야박한 사람들은 시위에 등장한 영국 깃발을 보면서 영국의 개 노릇을 하던 습관을 버리지 못한 자들이 개로 되겠다고 해서 몰락하는 영국이 받아주겠느냐고 비꼬았다. 미국 깃발의 등장은 더 거북한 조소를 자아냈다. 

 

민주는 물론 좋은 개념이다. 그러나 서방이 민주를 꺼린 적 있고 그것도 적어도 수십 년 잘 됨을 알거나 깨달은 사람은 많지 않다. 중국 푸단 대학의 학자 판융펑(范永鹏)은 얼마 전 텔레비전 프로 “이것이 중국(这就是中国)” 제29회에서 자신의 연구결과를 밝혔다. 그는 미국 역대 대통령의 취임연설사를 일일이 분석해보았는데,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미국 대통령들이 “민주”를 거들지 않았다. 1945년에 대통령 자리를 물려받고 1948년에 연임한 트루먼이 처음 연설에서 “민주”를 10여 차 언급했으나, 같은 연설에서 “자유”는 30여 회 등장했다. 그리고 1980년대까지 국제사회에서 “민주”하면 우선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을 떠올렸고 서방은 꺼렸다. 그러다가 소련이 붕괴되고 냉전이 끝나면서 서방이 “민주”를 가져다가 “자유”와 결합시켜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만들어냈는데, 어느 외국학자는 “자유민주주의란 민주의 탈을 쓴 자유”라고 지적했다는 것이다. 

 

판융펑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한국인들이 당연히 있겠다만, 민주가 서방 및 서방 영향 하의 사회에서 금기어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인기어였던 시절은 분명 존재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생겨난 사회주의 국가들은 “민주진영”이라고 자처했고, 6. 25전쟁 시기 정전담판과 그 이후 포로 교환에서 유엔군과 한국군이 세운 문의 이름은 “자유의 문”이었다. 백색테러정치를 실행하여 자유와는 동 닿지도 않는 타이완을 한국인들은 “자유중국”이라고 칭했다. 한국 선각자들이 민주화를 외치면서 군사정권을 반대하여 싸울 때, 민주는 얼마나 통치자들의 미움을 샀던가! 미국에 민주당이 있고 일본에 자유민주당이 있기는 해도, 민주가치 수출에 흥미를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동맹국들, 원유생산국들 중에 독재국가, 왕조국가들이 수두룩한 판에 괜히 민주팔이를 외치다가는 소련 진영에 질 수 있다는 우려가 서방 지도층에 만연했었다. 냉전이 끝나고 국제 판도가 변한 뒤에야 색깔혁명에서 민주가 인기를 끌면서 동맹국들이라도 이 독재자보다 말을 더 잘 들을 것 같은 정객을 올려놓는 방식이 유행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번 홍콩 사태를 1980년대의 5· 18이나 6월 항쟁, 2010년대의 촛불 혁명 등을 연결시켜 감상적으로 추상적으로 덮어놓고 민주화 투쟁이라고 추켜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대다수 중국인들과 깬 외국인들은 근년에 유럽과 서아시아,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난 격변들을 떠올리면서 선동수법과 폭동수법의 유사성 그리고 위험성을 지적한다. 복면 시위대의 이미지는 자연스레 ISIS(이른바 이슬람국가)의 모습과 오버랩 된다. 사실 한국에서 누군가 복면시위를 벌인다면 시민들의 지지를 받을까 아니면 경찰의 공격을 받을까? 

 

홍콩, 시위의 역사와 전망 

 

이번 홍콩 사태에 흥분하여 중국의 분열을 운운하는 한국인들이 꽤나 되던데, 사실 중국에서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웃음거리 구경을 즐기는 사람들이 다수이다. 시위대들이 쓴 구호들에 틀린 글자가 너무 많아 배운 게 없으니 저렇게 반대밖에 모른다는 풍자가 나왔고, “원망거밍(文盲革命 문맹혁명)”이라는 신조어도 생겼으며, 시위대들이 “시대혁명(時代革命)”을 “시벌혁명(時伐革命)”이라고 쓰는 등 한심한 오류에 빗대어 “문맹(文盲)”과 외형이 비슷한 글자들을 고른 “짱위거밍(丈育革命, 장육혁명, 뜻이 없음)”이라는 말도 유행된다. 

 

폭력 용의자, 국기 모독 용의자들을 경찰이 어렵사리 체포하면 법정이 곧 놔주는 악순환이 거듭되니 세상에서 제일 웃기는 게 “홍콩은 법치사회”라는 말이라는 주장이 퍼졌고, 시위대들이 역사지리개념 부족을 드러내는 말을 하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은 저 꼴이 된다는 풍자가 나왔다. “일국가 이제도”를 중국어로 “이궈량쯔(一国两制)”라고 하는데, 타이완인들의 기막힌 발언들을 풍자하여 발음이 같으나 글자가 다른 “이궈량쯔(一国两智)”가 나왔으니 “일국가 이지능”이라는 뜻이다. 요즘에는 이 신조어가 홍콩 시위대 풍자에 널리 쓰인다. 한심하게 틀린 글자들을 내놓고도 중국군 진압 증거라고 제시한 이른바 군모가 사실은 중국무장경찰부대가 수십 년 전에 쓰던 모자인 것, 중국 내지 유람객의 몸에서 뒤져낸 증명서에 “꿍안(公安공안)”이란 두 글자가 있다고 해서 공안경찰이라고 단정하여 뭇매질했는데 그 강아오퉁싱정(港澳通行证 홍콩, 마카오 통행증)은 워낙 공안기관이 모든 홍콩, 마카오방문자들에게 발급하는 증명서였던 것, 홍콩 주둔 중국군이 시위 진압에 개입한 엠뷸렌스를 발견했다면서 제시한 사진에서 엠뷸렌스를 의미하는 한자 “쥬후처(救護車)”가 본넷 위에 뒤집혀 찍혀서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것... 등등은 대륙의 상식으로써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능수준을 드러낸다.  

 

이번 사태에서 유달리 웃음을 자아낸 게 홍콩 공항 점령 전후 실내 시위에서 시위대들이 외친 “카이렁치(开冷气, 에어컨을 틀라)”라는 구호였다. 동영상에 달린 댓글들이 가관이었다. 혁명은 피와 땀을 흘려서 한다는데 땀을 좀 흘리기도 두려워하는 자들이 무슨 혁명을 떠들어대? 등등. 

 

18일 어떤 네티즌은 이렇게 비꼬았다. 70여 일 이어진 “혁명”에서 사람 하나 죽지 않았으니 돈을 대주고 지휘하는 자들도 답답하겠다. 

 

사실 지금까지 죽은 사람은 홍콩 정부에 항의한다고 층집(한국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죽었다는 사람뿐이다. 그 사람의 죽음이 그 후의 시위에서 활용되지 않은 게 이상하다. 소문에 의하면 전날 시위대가 홍콩 입법회 청사를 들이칠 때 불치병 환자들을 앞세우면서 경찰의 진압에 죽으면  큰 보상을 주겠다고 약속했다는데, 청사가 돌파될 때 경찰이 철수하는 바람에 계획이 튀었다 한다. 소문의 진위를 가리기는 어려우나, 지금껏 경찰과 맞서서 죽은 “열사”는 하나도 없고 이후에도 생겨날 가망이 적다. 

 

역사를 돌이켜보자. 

 

자그마한 어촌 홍콩이 영국 통치 하에 들어갔다가 중국에 돌아갈 때까지 백 수십 년 동안 거대 규모의 반항이나 시위는 3차례 있었다. 

 

하나는 1925년 6월부터 1년 4개월 지속된 대파업이니 역사적으로 “성강따빠궁(省港大罢工, 성항대파업)”이라고 부르는 바, 광둥성과 홍콩을 아울러 진행된 파업이다. 상하이 노동운동 지도자의 피살을 계기로 학생들이 시위할 때, 영국 조계지의 경찰이 발포하여 수십 명을 살상한 사건이 불씨로 되어 전국적으로 외국 세력 반대 운동이 벌어졌는데, 중국공산당의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당시 합작하던 중국 국민당 당원의 신분으로 홍콩 노조를 조직하고 6월 19일 파업을 일으키니 광둥성에서 곧 호응하는 파업이 일어났는데,.. 6월 23일 광둥성의 성도 광저우시에서 여러 계층 사람 10여 만이 시위하면서 조계지 앞을 지날 때 영국, 프랑스 군이 발포하고 군함도 포탄을 쏘아 52명이 죽고 170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숱한 사람들이 경상을 입었다. 이리하여 광둥성과 홍콩의 대파업은 전국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광둥성의 국민당 정부가 홍콩을 봉쇄하기에 이르렀다. 7월 초까지 10여 만이 홍콩을 떠나 광둥성으로 갔고 홍콩 시장이 불경기에 처해 숱한 상점들이 파산했으며 1925년 홍콩 수출입물품총액이 1924년의 절반으로 떨어졌다. 수입이 많이 준 홍콩 영국 당국은 런던에 300만 파운드 차관을 신청하여 간신히 지탱해나갔다. 홍콩 정부는 초기에 강경태도를 취하면서 런던에 군함 파견을 요청했으나, 영국 정부는 절제를 요구했고 총독을 바꾸었으며 광둥성에 있는 국민당 정부와 담판을 진행했다. 국민당이 북벌전쟁을 시작하는 등 내외 여건의 변화에 따라 10월에 홍콩 봉쇄가 해제되고 파업이 끝났다. 

 

홍콩이 중국어로 “샹강(香港, 향항)”인데 뜻풀이하면 “향기로운 항구”이다. 대파업으로 향향이 “처우강(臭港 취항)”으로 되었다는 평가를 들었다. 이 대파업은 1980년대 이전에 세계 노동운동사에서 최장기 파업으로 기록되고, 승리한 파업의 표본이기도 하다. 성공의 원인은 정치이념이 뚜렷한 단체의 조직과 지지, 전국의 지원,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구체적인 보조 등이다. 

 

그 후 중국 내전과 항일전쟁에서 홍콩은 미묘한 중립 지위로 하여 여러 세력이 정보와 물자를 획득하는 특수지역으로 되었고 따라서 그 어느 편도 큰 사태를 만들지 않았다. 

 

두 번째 큰 사건은 1956년 10월 10일부터 12일까지 홍콩 일부 지역에서 일어난 소동이니 “쐉스빠오뚱(双十暴动, 쌍십폭동)”이라고 불린다. 1940년대 말 중국 내전에서 패배한 국민당과 그 지지세력들이 홍콩에 밀려들어가 거주했는데, 본토박이들과 여러 모로 모순이 많았다. 그 패들은 이미 사라진 중화민국 국경일인 10월 10일(쌍십절이라고 함)을 기념하여 민국 국기 청천백일기를 걸고 쌍십 휘장을 벽에 붙이어 기념활동을 진행하곤 했다. 몇 해 지나 1956년 10월 초에 위생국이 거주지역 층집 벽에 깃발이나 장식물들을 붙이지 못한다는 규정을 내왔는데 깃발 걸기는 금지하지 않았다. 10월 10일 위생국 직원 2명이 어느 층집 벽에 붙여진 쌍십 휘장을 떼다가 발견되어 수백 명의 항의를 받았다.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시위자들이 당국에 제기한 3가지 요구는 정부가 10만 발 짜리 폭죽을 사줄 것, 빌딩 외벽에 국민당 창건자 쑨중산(손중산)과 타이완의 지도자 쟝제스(장개석)의 화상 및 중화민국 국기를 걸 것, 직원들이 신문에서 사과하고 쑨중산, 쟝제스 화상 앞에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릴 것이었다. 당국이 거절하여 시위대는 경찰과 대치했고 차차 사태가 커져 무력충돌이 벌어졌고 영국군과 경찰이 연합하여 진압했으며 11일 저녁부터 14일 오전까지 홍콩 역사상 첫 계엄이 실시되었다. 소동은 사흘 지속됐고 사건결속 날짜는 11월 14일인데 여기서 사망자는 적어도 60명, 부상자는 300명 이상이고, 1000명 이상이 체포됐고 일부는 축출되어 타이완으로 갔다. 공식 서류들에서는 의도적으로 조직된 사건이 아니라고 하면서 국민당 정권을 지지하는 삼합회 성원들이 범죄목적 달성을 위하여 사회질서 교란을 노렸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국민당 특무들이 사태 확대에 큰 역할을 했다고 공인된다.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홍콩에서의 국민당 세력의 약화를 가져왔다. 

 

세 번째 큰 사건은 11년 뒤인 1967년 5월 6일에 시작되어 10월에 종식되었으니 “류치빠오뚱(六七暴动, 육칠폭동)” 혹은 “류이줘파이궁후이빠오뚱(六七左派工会暴动 육칠좌파노조폭동)”, “샹강우워펑빠오(香港五月风暴, 홍콩오월폭풍)”이라고 불린다. 이는 중국 대륙에서 진행 중이던 문화대혁명과 이웃한 마카오에서 전해 12월 3일부터 그해 1월 28일까지 진행된 “12· 3사건”의 영향을 받았다. 마카오에서는 학교 확장으로 인한 철거문제를 둘러싼 충돌에서 경찰의 강경진압 및 발포로 8명 혹은 11명이 사망하고 200여명이 부상당하는 바람에  좌파가 주도하여 항쟁을 벌였고 결과 포르투갈 식민지 당국은 포르투갈인과 무관한 사회 사무에서 거의 손을 떼고 국민당 세력은 마카오에서 밀려났으며 친 중국 인사들과 단체들이 마카오 사회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이 변화는 뒷날 마카오의 귀환 이후 별 말썽 없이 잘 돌아가는 현상과 직결된다. 

 

중국 대륙 문화대혁명이 이전의 대홍콩정책을 비판하고 마카오가 세력구도개변에 성공하니 홍콩에서는 우리도 바꿔보자는 사람들이 나섰다. 구체적인 과정은 너무 길어 일단 생략하고 결과만 적으면 사망자는 경찰 11명, 영국군 1명, 소방원 1명을 포함한 51명(홍콩 스타 런다화- 임달화의 아버지가 경찰관으로서 그때 사망했다), 부상자는 경찰 212명을 포함한 802명, 기소된 자는 1936명, 사건 관련 폭탄은 1,167개였다. 홍콩 식민지 당국의 정책개선을 촉진하는 결과를 낳기는 했으나, 방화와 암살 등은 잘못으로 지적된다. 

 

1967년 이후 영국 당국이 노동, 거주, 오락 등 방면에서 개혁을 진행하면서 사회모순이 완화되었고 중국 대륙이 계속 홍콩을 대외 창구로 활용하면서 홍콩이 경제적으로 큰 발전을 이룩해 “아시아 네 마리 용”의 하나로 되었으며, 1997년까지 수십 년 동안 깡패들의 칼부림은 많았어도 대규모 시위나 항의는 나타나지 않았다. 

 

영국 통치 하의 3차례 대형 사건을 보면 1920년대 중반의 대파업은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이 손잡고 지도했고, 1956년의 폭동은 국민당 및 친국민당세력이 주도했으며, 1967년의 폭동은 공산당과 친공산당세력이 주도했다. 주도 세력이 분명하고 사건경과가 명백하며 두 폭동은 사망자, 부상자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2014년 빈과일보 사주가 사촉한 “우산혁명”은 실패로 끝났는데 식어가던 불씨를 살려준 건 홍콩 법원이었다. 체포된 청년 리더들을 경하게 처벌하여 내보냈고 경찰들은 과잉진압을 이유로 중하게 처벌하였던 것이다. 결국 몇 해 지나 사회모순이 보다 심화된 지금에 와서 보다 큰 규모의 사태가 벌어졌는데, 이에 대해 중국은 거듭 미국이 배후에서 조종함을 비난했고, 타이완의 개입도 비판했다. 미국은 개입을 부인하면서도 실제로는 관원들이 홍콩 반대파 인물들을 만났고, 타이완 “총통” 차이잉원(채영문)은 아예 드러내놓고 홍콩 시위를 지지했다. 하기에 홍콩에는 정말 순수한 동기로 시위에 참가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남의 돈을 받고 움직이는 자들도 분명 존재한다. 

 

이번 시위는 참가자의 복잡성, 배후조종세력의 복잡성, 지도부의 복잡성 등으로 하여 불명확한 세부들이 많고 보도의 편파성으로 하여 걸러져 보도되지 않는 사실들이 많으며, 왜곡된 정보들이 난무하는 등이 특징이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열사가 아직껏 생겨나지 않은 것도 특징 중 하나이다. 

 

앞의 대형 사건들이 정치세력들의 담판 혹은 압도, 혹은 타협으로 끝났다면, 이번 시위는 중국이 물러설 수 없는 선을 견지하는 이상 담판이나 타협으로 끝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가장 가능한 결과는 배후 세력과 금주들의 후퇴로 하여 시위의 동력이 줄어들다가 사라지고 폭력사용자들이 체포되는 것이다. 단 지금까지 홍콩 법원의 행태에 비춰보면 경처벌 지어 석방으로 하여 범죄자들의 사기가 되살아날 수는 있다. 허나 6, 7월처럼 격렬한 충돌이 일어날 환경은 다시 생기기 어려울 것이다. 

 

홍콩이 놓친 기회, 바꿔야 할 것 

 

홍콩 시위가 일정한 민의를 대표함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단 그 시위가 다수 홍콩인들의 의사를 대표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다. 이번 시위로 중국의 대홍콩 정책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많은데, 상층 엘리트 그것도 상인들에 의거해온 기존 정책이 틀렸으니 대중을 상대로 하고 대중에게 이익이 되는 정책을 실시해야 된다, 이번 시위로 무식함의 극치들이 드러났으니 반드시 중국을 적대시하는 교육상황을 바꾸어야 한다, 홍콩 법원을 외국적 법관들이 장악했으니(이는 영국이 물러가면서 매설한 지뢰라고 불린다) 반드시 구조를 바꾸고 범죄를 법원이 조장하는 상황을 뒤집어야 한다 등등이다. 

 

국제정치 전문가인 진찬룽(金灿荣) 교수는 최근 연설에서 홍콩이 놓친 기회를 언급했다. 1997년 반환 이후 제1대 행정장관 둥졘화(董建华, 동건화)는 “쑤마강(数码港, 디지털 항구)”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당시 홍콩의 자금과 인력자원에 비춰보면 홍콩이 디지털산업을 발전시키면 중국 대륙에서 지금 소문난 “얼마(二马, 거대기업 알리바바의 창시자 마윈과 텅쉰의 창시자 마화텅)”이 생겨날 수 없다, 그런데 부동산업자들이 반대하여 프로젝트가 무산됐고, “쑤마강”은 결국 홍콩 갑부 리쟈청(광둥어 발음 리카신)의 아들 리저카이(李泽楷, 이택해)가 부동산프로젝트로 만들어버렸다. 홍콩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홍콩 젊은이들이 대학을 졸업하면 일자리가 얼마든지 있을 텐데, 지금 홍콩 대학졸업생들의 월급이 고작 1만 홍콩 달러이니 뭘 먹고 살겠는가?

 

진찬룽 교수의 주장은 타이완 사람들도 주목하여 텔레비전 프로에서 그대로 인용했고 또 뒷날 홍콩 행정장관이 거대기업 텅쉰의 창시자 마화텅을 청해다가 자문했으나 홍콩에서의 IT창업은 기회가 없다는 답을 들었다고 보탰다. 

 

워낙 홍콩은 소상품과 복장 따위 가공업으로 경제발전을 시작했다. 1970년대까지는 가공업체들이 많다가 중국 대륙이 본격적으로 개혁개방을 하면서 가공업은 인건비가 보다 싼 대륙으로 이전하고 대륙과 서방 사이의 중개무역이 고속발전하면서 떼돈을 벌었다. 허나 중국 대륙이 외국과의 직거래를 늘이면서 중간이윤을 벌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선박운수업자였던 둥졘화는 홍콩의 병목을 포착하였기에 산업을 전환시켜 디지털산업 중심으로 나가려 했는데, 부동산업자들의 반대로 실패하고 말았다. 오히려 마카오가 근년에 첨단과학회사들을 유치하면서 도박도시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씻어나간다. 

 

디지털 산업 외에 둥졘화가 추진한 다른 큰 프로젝트는 공공주택 건조였다. 집을 대량 건조하고 공공주택비율을 높임으로써 홍콩인들의 거주조건을 개선한다는 계획인데, 운 나쁘게도 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에 부딪쳐 좌절되었고 또 부동산업자들만 아니라 시민들의 반대까지 받았다. 가격이 저렴한 주택들이 틀어나면 분명 시민들에게 유리하건만 이미 큰돈을 들여 집을 산 사람들은 높은 이윤을 노릴 수 없게 되므로 격렬하게 반대했던 것이다. 결과 그 후 홍콩 공공주택 건설은 뜨거운 감자로 되어 누구도 건드리지 못했고 홍콩 집값은 세계 최고반열에 당당히 끼인다. 너무 높은 집값 때문에 홍콩인들의 전도가 어둡다는 비판이 오랫동안 지속되건만, 갑부들의 갑질로 하여 바꿀 방법이 없었다. 홍콩이란 도시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하여 “리빤청(李半城)”이란 별명이 붙은 리쟈청이 중국 대륙에서도 홍콩에서도 큰 발언권을 가졌으니 그를 반대할 만한 인간도 단체도 홍콩에서는 생겨나기 어려웠다. 

 

리쟈청이 홍콩 최고 갑부, 세계 특대 부자로서 중국 대륙에서 한동안 우러러보는 대상으로 되었는데, 근년에는 이미지가 많이 나빠졌다. 자선활동은 자꾸 하지만 땅 투기로 번 돈이 너무 많아서였다. 상하이의 중심지역에서 32억 위안을 들여서 부지를 사고는 개발을 질질 끌다가 10년 지나 땅값이 10배 이상 오른 다음 팔아넘긴 사건이 유명한데, 전국 각지 주요 도시들에서 거의 다 그런 짓을 해먹었다는 게 관건이다. 

 

1997년부터 20여 년 동안 홍콩 GDP 장성폭은 1배 좀 넘긴다. 그런데 홍콩 4대 가족의 자산은 20여 년 동안 5배 이상 늘어났고 리쟈청 가족의 재산 증가폭은 5배보다 훨씬 높다는 게 정설이다. 그러니 홍콩 백성들의 생활품질이 어떻게 개선되겠는가? 

 

한편 1997년에 홍콩 GDP는 전 중국의 18%를 넘겼는데, 2018년에는 3% 미만이다. 상하이, 베이징, 광저우, 선전 등 도시와 성들이 GDP 수자로 홍콩을 추월하면서 홍콩의 몸값은 점점 떨어진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선전은 홍콩 기업들의 가공공장으로 첫 돈을 벌었다. “피바오꿍스(皮包公司, 가죽가방회사, 실체도 사무실도 없고 사장이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다니는 소형회사)”들이 오더를 물어오면 가공해서 넘기면서 몇 푼 안되는 가공비나 벌고, 중개무역상들이 떼돈을 벌던 호시절은 지나갔다. 이제 와서 선전은 첨단 기업 집결지역으로 된지 오래다. 2018년 트럼프가 무역전을 벌이고 중국 기업들을 제재할 때, 중국에서는 이건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이 아니라 미국 대 선전시 심지어 미국 대 선전시 어느 구역의 싸움이라는 말이 나왔다. 트럼프가 겨냥한 기업들이 대부분 선전시에 있었고 그것도 어느 구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선전이 이제는 중국특색 사회주의 선행시범구역으로 성장하니 그 발전 전망은 상상하기 어렵다. 선전이 어촌이던 시절, 홍콩 관광의 특색 종목은 선전과 맞붙은 고장에 가서 어촌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요즘 중국인들은 홍콩이 자꾸만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하다가는 어촌으로 전락하여 구경거리로 되겠다고 농담한다. 

 

홍콩이 번영한 주요원인은 중국 대륙이 서방세력의 제재와 봉쇄를 받던 시절 중국 대륙의 유일한 대외 창구로서 중개무역 활용해서이다. 그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때문에 홍콩 문제를 뿌리 뽑자면 산업구조를 바꾸고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주며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해야 된다. 그러자면 아주 복잡한 문제들이 얽히는데 중앙과 홍콩에서 어떻게 지혜를 모아가느냐가 중요하겠다. 

 

홍콩의 사태를 놓고 외부에서는 만약 중국이 무력 진압하면 “일국가 이제도”의 실패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허나 홍콩기본법 제정에 참여했던 량아이스(梁爱诗)는 무력진압하더라도 제도의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사실 전날 영국 경찰과 영국군의 진압이 유열사태를 빚었으나 누구도 영국 통치의 실패를 떠들지는 않았다. 게다가 바로 곁에 일국가 이제도를 훌륭히 실행하는 마카오가 있기 때문에 홍콩의 실패여부가 “일국가 이제도” 실패의 근거로는 되지 않는다. 

 

앞에서 언급한 연설에서 진찬룽 교수는 워낙 홍콩의 일국가 이제도는 타이완에게 시범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였는데, 이제 와서는 타이완의 행티로 하여 그런 역할의 가치가 사라졌다고, 중앙은 타이완에 대해 “일국가 일제도”를 실시하려는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그는 빠르면 명년 초에 무력통일행동이 진행될 수 있다고 예언했다. 필자의 홍콩 관련 예언보다는 훨씬 중요한 예언인데,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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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긴다, 언론타령 19/08/22 [10:35]
1. 자유주의, 사회주의 언론타령 : 사회주의 중국에는 언론이 있기는 있기나 하고 이야기를 전개함 ? 2. 복면시위 : 한국도 철권통치 시대때 복면시위를 주로했다. 민주주의가 정착되고서 복면은 내려갔다. 홍콩도 노출시 받는 불이익이 너무나 크기에 복면을 할 뿐이다. 하긴, 중국에서의 시위는 복면을 하지 않는다, 어차피 탄로날 것이고 어차피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 아닌가 ? 3. 중국의 언론플레이 : 공산당이 장악한 언론아닌가. 거기서 나오는 의견들은 언론인가, 공산당 의견인가. 자기나라에서 심상치않은 일이 발생하는데 조롱한다, 든가 하는 개념들을 보면 중국은 갈길이 너무나 먼 나라같다. 션젼을 아무리 개발하면 뭐하나. 과연 서방 자본들이 션젼에 은행을 세울까 홍콩을 움직이는 돈은 누구것인가 ? 수정 삭제
유위자 19/08/22 [10:54]
사상이 애매한 흑묘 백묘국은 오래가지 못한다. 사실 애신각라의 나라 청나라의 유산인 현 중국의 영토는 아무런 사상도 없는 남방정권이 다스리기엔 너무나 크다. 남방정권은 양자강영역에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이제 새로운 사상이 대륙을 휩쓸게 될 것이고 그때가 원시반본하여 새로운 북방권력이 대륙을 지배하는 시대가 될 것이다. 사상이 없이 폭력과 억압으로 지배하는 권력은 30년 이내에 그 수명을 다하게 될 것이다.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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