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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으로 보는 북한-서문] 광복에 대한 남북의 시각차

nk투데이 | 기사입력 2022/02/18 [08:46]

[헌법으로 보는 북한-서문] 광복에 대한 남북의 시각차

nk투데이 | 입력 : 2022/02/18 [08:46]

북한 사회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한 사회 구조와 작동 원리를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한 가장 좋은 교재는 북한 헌법이다. 

헌법을 분석하다보면 북한 사회의 기본 이념과 국가 정체성, 사회 구조와 작동 원리, 국가 정책과 노선을 잘 알 수 있다. 

이에 nk투데이 편집부는 북한 헌법을 하나하나 파헤쳐보는 연재를 기획하였다. 

분석할 북한 헌법은 현재 한국에서 입수할 수 있는 가장 최신판인 2019년 8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2차 회의에서 수정보충한 헌법을 기준으로 한다. 

또한 표기법은 한국의 맞춤법을 따르되 불가피한 경우 북한 표기를 그대로 두었다. 

북한 헌법은 통일부, 법무부, 법제처가 공동 운영하는 통일법제 데이터베이스(https://unilaw.go.kr)에서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 

 


 

 

(이어서)

 

넷째, ‘조국광복을 이룩’했다. 

 

미국이 핵폭탄 두 발을 일본에 떨어뜨려 일제가 무조건 항복을 했으며 그 덕에 광복을 맞았다는 우리의 통념과 달리 북한은 김일성 주석의 항일운동을 통해 광복을 이뤘다고 여긴다. 

 

이런 역사해석의 차이는 크게 세 가지 원인에서 출발한다. 

 

첫째는 일제강점기에 해방을 위해 어떤 활동을 했느냐의 차이가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나 광복군 등 민족주의 독립운동세력은 초기의 활발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중후반기에 이르러 눈에 띄는 활동을 하지 못했다. 

 

심각한 내부 권력 갈등과 부정부패, 강대국에 의존하는 사대주의적 독립운동방식,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보호하고 도와주기는커녕 세금이나 군자금 명목으로 갈취하느라 잃어버린 민심, 국민당의 견제로 인해 광복군 통솔권도 빼앗긴 형편 등 여러 요인이 있었다. 

 

심지어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1925년 탄핵을 당할 정도로 신임을 잃었다. 

 

광복군 활동은 대한민국 정부도 그다지 인정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사례로 한국 정부는 국군의 날을 광복군 창건일인 9월 17일로 바꾸자는 요구를 특별한 이유도 없이 수십 년째 묵살하였다. 

 

이처럼 대한민국임시정부나 광복군의 활동에 대해 한국 사회는 그다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이런 이유로 자력으로 독립했다기보다 외부의 도움으로 독립했다는 견해가 주류를 차지한 것이다. 

 

반면 북한의 역사 서술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1920년대 중반부터 1945년 광복까지 꾸준하고 맹렬한 항일운동을 하였다고 한다. 

 

특히 1937년 6월 함경남도 보천보전투, 1939년 5월 함경북도 무산지구전투 등 국내진공전투는 당시 국내에도 화제를 모았다. 

 

또한 1937년 9월부터 1년 동안이나 진행된 혜산사건은 김일성 주석이 창립한 조국광복회가 국내에 얼마나 광범위하게 꾸려졌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둘째는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무조건 항복을 하기 전에 한반도에 진공하였느냐의 차이다.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 발족한 한국광복군은 1944년경부터 미 전략사무국(OSS: 중앙정보국, CIA의 전신)과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였다. 

 

1945년 8월 11일 이범석을 총지휘관으로 하는 국내정진군을 편성하였으나 국내 진공 전에 일제가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다. 

 

하루 뒤인 8월 16일 미군 수송기를 타고 선발대가 출발했지만 중간에 돌아왔고 8월 18일 다시 국내 진입을 시도해 서울에 착륙했지만 일본군의 저항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이후 한반도 38선 이남에 들어선 미군정은 ‘사설 군사단체 해산령’을 내려 광복군을 해체시켰다. 

 

결국 이들은 1946년 5월 말에야 광복군이라는 이름도 내걸지 못한 채 귀국해야만 했다. 

 

반면 북한의 역사 서술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이 이끌던 항일부대인 조선인민혁명군은 일제의 항복 전에 이미 한반도에 진공하였다고 한다. 

 

만주 지역에서 항일부대를 이끌던 김일성 주석은 1942년 소련의 뱌츠코예 북야영에서 국제연합군 창설에 참여한다. 

 

국제연합군에는 조선인, 중국인, 러시아인 등 15개 민족이 참여했으며 소련은 제2극동전선군 산하 88독립보병여단, 중국은 동북항일연군교도려라고 불렀다. 

 

여기서 김일성 주석은 조선인으로 구성된 1대대의 대대장 지위를 가지고 활동했으며 만주 지역에 지속적으로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를 파견하였다. 

 

1945년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자 김일성 주석도 조선인민혁명군에 국내 진공을 명령했다. 

 

그리하여 8월 9일 한반도의 웅기, 나진으로 진출해 11일에 점령하였으며 8월 13일에는 청진으로 진격했다. 

 

이처럼 광복군과 달리 조선인민혁명군은 일제가 항복하기 전에 이미 한반도에 진공하여 자기 손으로 광복을 이뤘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셋째는 미국에 대한 입장 차이다. 

 

사실 미국이 일제 패망을 앞당겼다고 해도 미국을 ‘해방의 은인’으로 여기는 건 지나친 비약이다. 

 

일제 패망을 앞당긴 게 미국만은 아니었고, 미국이 한반도를 해방시킬 목적으로 일제와 전쟁을 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의 지배를 받았던 유럽의 많은 나라들도 미국이나 영국이 자신들을 해방시켜줬다고 여기지 않는다. 

 

다들 자신들의 노력으로 독일을 물리쳤다고 여긴다. 

 

마찬가지로 일제의 지배를 받았던 동아시아의 많은 나라들 역시 자신들의 독립 노력을 강조한다. 

 

미국 덕에 해방됐다는 인식은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객관적으로 봐도 미국이 일제 패망의 결정적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 2015년 8월 10일자 뉴시스 보도 「“日 항복, 원자탄 아니라 소련의 참전 때문” LA 김태환회장」을 보자. 

 

현대사료연구가 김태환 남가주한인하버드동창회장은 각종 사료를 통해 미국의 핵폭격이 일제 항복의 결정적 요인은 아니라고 입증했다. 

 

김 회장은 “하세가와 추요시 UC 산타바바라대 교수가 저서 「적과의 경쟁(Racing the Enemy)」에서 ‘일본은 원자탄 때문에 항복한 것이 아니라, 연합국과 종전을 중재해 줄 것으로 믿었던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후 무서운 속도로 만주를 휩쓸고, 거의 모든 정예 관동군을 섬멸, 그 기세로 일본 본토쪽으로 진군한다면, 막을 도리가 없으니 본토만이라도 미국의 보호를 받는 쪽이 낫다고 판단해서 항복하게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라며 일본인 교수의 주장도 소개했다. 

 

또한 뉴욕타임스의 2015년 8월 8일자 사설 「잊혀진 도시 나가사키」도 “일본의 항복이 소련의 선전포고로 예견됐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라고 보도했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광복은 미국 덕분’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진 이유는 뭘까. 

 

해방 후 38선 이남에는 미군정이 들어서 강압적인 통치를 하였으며 친미파로 변신한 친일파를 등용했다. 

 

이로 인해 미국을 ‘해방자’, ‘은인’으로 여기는 관점만이 존재할 수 있었다. 

 

이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강해졌다. 

 

반면 38선 이북에는 소련군정이 들어섰지만 조선인의 독자적인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보장하였다. 

 

1945년 9월 20일 스탈린 소련공산당 서기장과 안토노프 소련군 참모총장은 연명으로 소련 극동사령관에게 비밀훈령을 보내 북한의 국가 창건에 개입하지 말고 독자성을 보장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후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 논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북한은 미국을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방해하고 북한을 ‘침략’한 존재로 각인하였다. 

 

따라서 북한이 미국을 ‘광복의 은인’으로 여길 이유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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