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이 산하에] 조선 침략을 시작하는 일본 5. 민중이 흥선대원군을 택한 이유는

구산하 | 기사입력 2022/11/11 [14:17]

[이 산하에] 조선 침략을 시작하는 일본 5. 민중이 흥선대원군을 택한 이유는

구산하 | 입력 : 2022/11/11 [14:17]

흥선대원군을 찾아간 민중들

 

임오군란 당시 봉기한 군인과 민중은 흥선대원군의 재집권을 원했다. 결국 고종은 사태의 수습을 위해 흥선대원군의 입궐을 명했고 흥선대원군은 폭동을 일으킨 군인의 호위를 받으며 궁으로 들어왔다. 이후 정국 운영의 실질적인 권한은 흥선대원군에게 넘어갔다.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며 권력에서 밀려났던 흥선대원군의 화려한 복귀였다.

 

당시 민중이 흥선대원군을 불러낸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의 원흉으로 민비와 그 척족 세력을 지목했다. 외세의 침탈, 이에 빌붙은 정치 세력의 폭정이 자신들의 삶을 짓밟았다고 본 것이다. 

 

민중의 눈은 매서웠고 그 발걸음은 더욱 매서웠다. 봉기한 이들은 가장 먼저 일본 공사관을 습격했고 그다음으로 민비 일당이 있던 궁궐에 쳐들어갔다. 그들을 모두 몰아낸 민중은 이제 자기 뜻을 실현해줄 새로운 정치 세력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 기준은 명확했다. 외세에 맞서는 자주적인 권력. 부정부패에 단호한 권력. 백성의 삶을 안정시킬 권력. 이런 맥락에서 흥선대원군이 다시 소환된 것이다.

 

흥선대원군,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흥선대원군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각도에서 조명이 가능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봉기한 민중이 왜 흥선대원군을 선택했는가에 집중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 흥선대원군. [사진출처-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다

 

흥선대원군이 당대 민중과 운명을 함께하는 진보적인 정치가라고 말하긴 어렵더라도, 그가 세운 공적은 분명하다. 우선 흥선대원군은 세도 정치 이후 혼란했던 나라를 수습하고 백성의 삶을 안정시켰다. 이 짧은 한 줄의 설명으로는 그것이 당대 민중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다 담을 수 없을 것이다. 

 

조선 후기 순조, 헌종, 철종의 60여 년에 걸친 세도 정치는 포악하고 가혹한 정치, 학정 그 자체였다. 그 아래 신음하는 백성의 삶이 얼마나 처참했던지, 다산 정약용은 자신이 목격한 현실을 ‘애절양’이라는 시에 담았다. 

 

애절양은 양근(남성의 성기)을 자른 것을 슬퍼한다는 뜻이다. 이 시에 어린 사연은 이렇다. 한 백성이 아이를 낳았는데, 그 지역의 탐관오리가 태어난 지 겨우 3일밖에 되지 않은 갓난아이를 군적에 올렸다. 그러고는 군포(병역의무자인 자가 현역으로 복무하지 못할 시 부담하는 세금)를 명분으로 그 집에 있던 소를 끌고 가버렸다. 이에 그 백성이 자식을 낳은 것이 죄라며 자기 생식기를 잘라버렸다는 것이다. 그 아내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편의 생식기를 들고서 관청을 찾아가 울며 하소연했으나, 소는 되찾지 못하고 쫓겨났다. 

 

이 사연 하나만 보더라도 세도 정치로 인해 나라가 얼마나 썩어 문드러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세도 정치를 끝낸 것이 흥선대원군이다. 흥선대원군이 집권 후 첫 공식 석상에서 대신들을 앉혀놓고 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나는 천 리를 끌어당겨 지척을 만들고, 태산을 깎아 평지를 만들며,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려 하는데, 제공들의 생각은 어떠하오?”(황현, 매천야록)

 

여기서 천 리를 지척으로 삼겠다는 것은 세도 정치 시기 배제되었던 종친의 정치 참여를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태산을 깎아 평지를 만든다는 것은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노론을 누르겠다는 것이며,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겠다는 것은 정계에서 소외되었던 남인 세력을 등용하겠다는 뜻이다. 흥선대원군은 첫 등장부터 세도 정치를 끝내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표한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정치기구를 정상화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본래의 목적과 달리 비정상적으로 강화되어 세도 가문의 권력 기반이 되었던 비변사를 폐지하고, 유명무실해졌던 의정부의 기능을 복구했다. 또한 삼군부를 부활해 왕이 군사 문제를 직접 통제하고자 했다. 

 

나아가 신분이나 당파에 국한되지 않고 재주가 있는 사람을 고르게 등용했다. 흥선대원군의 이런 인재 중시 정책은 많은 이들에게 활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흥선대원군의 저택인 운현궁은 자기 재주를 선보이려는 사람들로 늘 북적였다고 한다.

 

다음으로 흥선대원군은 백성의 삶을 괴롭힌 조세 제도, 삼정(전정, 군정, 환정)의 문란을 바로 잡았다. 먼저 양전 사업을 통해 양반들이 숨겨놓은 땅을 찾아내 국가 재정을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지주가 농민들을 이용해 토지를 소유하고 세금의 책임에서 벗어나는 일들이 시정되었다. 또 죽은 자와 갓난아이에게도 세금을 물리던 군포를 바로 잡기 위해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담하게 하는 호포제를 실시했다. 양반에게 부여된 특권을 없애버린 것이다. 

 

무엇보다 백성의 원성이 자자했던 것은 환곡이었다. 원래 환곡의 취지는 나라가 보릿고개에 굶주리는 백성을 위해 곡식을 대여해주고 가을에 갚게 하는 것으로,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지방의 탐관오리에 의해 고리대 사업으로 전락하거나, 꾸지도 않은 곡식을 꿔줬다며 장부에 이름을 올려 백성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흥선대원군은 사창제(지방의 마을에 사창을 설치하여 곡물을 대여하도록 한 제도)의 실시로 환곡의 폐단을 끊어냈다. 그리고 백성들이 환곡으로 인해 정부에 진 빚을 모두 탕감해주었고, 마을의 주민들이 곡식의 저장과 관리를 담당하게 하여 지방 수령들에 의한 부정부패를 차단했다.

 

이는 대단한 혁신이었다. 당시 민중의 입에서는 나라님이 바뀌니 세상이 바뀌었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여기에 정점을 찍은 것이 서원철폐이다. 서원은 본래는 유생들을 가르치던 대표적인 사학 교육 기관이다. 그러나 전국 곳곳에 퍼진 서원은 당파의 근원이 되는가 하면, 면세와 면역의 특권을 누리며 나라의 재정을 좀먹었다. 그러면서 백성들을 상대로 돈이나 물건 따위를 갈취하는 등의 횡포를 일삼았다. 서원은 이미 교육 기관이 아니라 기득권 세력의 본거지 같은 곳이었다. 혹자는 서원을 도둑의 소굴이라 표현했을 정도였다. 이처럼 서원에 대한 백성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지만, 역대 조선 정부는 이를 바로 잡지 못했다. 유생들의 반발이 드셌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이 이 서원을 허물어버린 것이다. “백성을 해치는 자는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내가 용서치 않는다”라는 명언과 함께 말이다. 유교 사상을 자기 정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에 공자가 어떤 존재인가! 그런데 공자보다 귀한 것이 이 나라 백성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는 조선을 공자의 나라로 부르던 성리학자들에 폭탄을 던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흥선대원군은 600여 개의 서원을 철폐하고 단 47개의 서원만 남겨두었다. 허물어진 서원 앞에서 유생들은 잃어버린 자기 기득권을 안타까워하며 미친 듯이 울부짖었고, 백성은 끝없는 환호를 보냈다. 

 

흥선대원군이 이룬 민생 안정은 큰 업적이라고 할 만하다. 오늘날 우리 정치에서 흥선대원군만큼이라도 국민을 위하는 이들이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국민을 해치는 자는 그 누구라 해도 용서치 않을 것이라는 배포를 보여주는 정치인이 있는지 말이다. 세도 정치 아래 백성의 피를 빨아먹던 탐관오리와 같은 자들이 득실거리지는 않는가! 그 옛날 봉건왕조의 인물보다도 못한 정치인들은 진정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끝없이 발전하는 국민의 주권 의식은 이런 정치 세력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도 똑똑히 알아야 할 것이다.

 

부국강병의 꿈

 

흥선대원군의 목표는 부국강병이었다. 세도 정치로 황폐해진 나라를 정상화하고 왕실의 위엄을 세우며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는 강한 나라. 그것이 당시 흥선대원군이 꿈꾸는 부국강병의 상이었다. 이 부국강병을 담보하려면 국가 재정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각종 조세 제도를 개혁해 민생을 안정시킨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민생이 안정되니 자연스레 나라의 살림살이도 튼튼해졌다.

 

또 흥선대원군은 나라를 좀먹는 탐관오리들을 소탕했다. 나라의 세금을 횡령한 이들을 일제히 조사해 사형, 귀양, 직위 박탈 등의 처벌을 가했다. 이를 통해 백성의 숨통을 조이던 수많은 탐관오리가 축출되었다. 중간에서 야금야금 빼먹는 이가 없으니 나라의 곳간도 풍족해졌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10년, 나라의 재정은 비할 바 없이 늘어난다.

 

부국강병을 위한 국가 재정의 확보는 국방력 강화를 위한 시도로 이어졌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흥선대원군이 서양의 과학기술에도 깊은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박제형의 『근대조선정감』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은 특히 서구의 증기선과 무기에 관심을 가지고 그 제조를 시도했다. 신미양요 당시 침몰한 제너럴셔먼호를 한강으로 가져와서 이와 같은 철갑선을 만들게 하거나, 서양의 총포와 화약을 직접 제조해보게 한 것이다. 

 

많은 이들이 흥선대원군 하면 나라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쇄국’정책을 먼저 떠올리곤 한다. 그런 흥선대원군과 서양의 무기라니, 다소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서양 세력에 날을 세웠던 것은 그가 쇄국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서양 세력의 접근이 제국주의적 침략의 형태로 이뤄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흥선대원군은 나라가 준비되기 전까지 문을 열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이 일련의 과정은 민심을 모으는 시간이 되었다. 세도 정치로 인해 흉흉하게 흩어졌던 민중의 마음이 흥선대원군의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부국강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앞선 여러 편의 글에서 다룬 것처럼 이를 기반으로 조선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두 차례의 외세 침략을 막아냈다. 흥선대원군은 외세의 침략에 단호했으며, 이는 외세 침략에 분연히 떨쳐 일어나 저항하고자 했던 민중의 지향과도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이제 다시 질문을 던져본다. 왜 봉기한 군인과 민중은 흥선대원군을 불러냈을까. 

 

명확하다. 그들이 흥선대원군을 소환한 것은 단순히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다. 민비를 몰아내고 재집권하고자 하는 흥선대원군의 계략에 놀아난 것도 아니다. 민중들은 당대 현실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선택한 것이다. 자기의 이해와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가장 좋은 선택을 한 것이다. 아마 그 뜻을 더 잘 품을 수 있는 정치 세력이 있었다면 서슴없이 그들을 선택했으리라. 

 

임오군란 당시 민중의 모습에서 오늘날 촛불 국민이 보인다. 본질을 꿰뚫고 적을 간파하며 조금의 주저함 없이 달려 나가는 민중의 위대함을 본다. 1882년 조선의 민중도, 2022년 대한민국의 민중도, 그 기나긴 역사에서 이 땅 민중은 언제나 위대하다. 그 축적된 역사적 경험으로 우리는 오늘도 한 발 더 전진해가고 있다. 

 

다음 편에서는 임오군란의 끝을 다룬다. 성난 민중에 쫓겨난 민비와 일본이 어떻게 다시 돌아오는지 살펴본다.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이 산하에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