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4·19혁명 못지않은 대규모 한일 굴욕외교 반대 시위인 6·3항쟁 59주년이다.
1964년 3월 5일 청와대에서 열린 정부, 공화당 연석회의에서 한일통상회담을 재개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청와대에서 회의가 있은 다음 날 3월 6일 야당, 사회·문화단체 대표 2백여 명은 ‘대일 굴욕외교 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를 발족하고 ‘구국 선언문’과 ‘대정부 경고문’을 발표했다.
구호로 ‘한일회담의 즉시 중지, 일본에 대한 반성 요구, 민족정기 고취’를 내거는 한편 한일회담의 대안으로 ‘청구권 27억 달러, 평화선의 40해리 전관수역’을 제시했다.
정치에 참여하지 않던 많은 인사도 참가하였고 대학생뿐 아니라 고등학생과 일반 시민이 참가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했다.
3월 21일 야당이 주최한 서울의 성토 집회에서는 4만여 명의 시민이 몰려 한껏 투쟁 열기를 고양했다.
그리고 3월 23일 김종필 공화당 의장이 도쿄에서 오히라 외상과 만나 한일회담 일정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고 발언함으로써 한일회담 투쟁에 기름을 붓는다.
다음날인 3월 24일,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의 대학생 약 4,000명이 김종필 즉시 귀국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또한, 전국 주요 도시에서도 8만여 명의 학생과 민중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개최됐다.
특히 서울에서는 500여 명의 고등학생이 한일회담을 강요하는 미국 대사관 앞에서 연좌 농성을 벌였다.
국회 앞에서는 1,000여 명이 모여 일본 회사의 간판을 때려 부수고, 한일교섭 중지를 요구했다. 당시 시위 현장에서 외쳤던 구호는 다음과 같다.
미국은 한일회담에 간섭지 마라! 한일 굴욕 외교 반대! 한일회담 즉각 중지! 제2의 이완용을 소환하라! 나라 파는 한일회담 즉각 중지하라!
그리고 학생을 위시한 민중의 투쟁은 계속된다.
박정희의 한일회담 유보와 미국의 압박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나섰던 박정희는 한일회담 반대 투쟁으로 정권 출범 이후 최대의 위기에 몰렸다.
박정희는 청와대 주위에 전기 철조망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헬멧과 방석모로 무장한 군대로 하여금 경비를 서게 했다. 또한, 청와대로 향하는 시내의 주요 교차로에는 군대와 경찰을 파견하여 시위대의 진입을 차단했다.
그러나 일본이 어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무장 순양함을 한국 근해에 배치해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국회는 즉각 한일회담의 중지를 요구하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한다.
그리고 한일교섭의 임무를 띠고 일본에 있는 김종필을 소환하라는 민중의 요구에 박정희는 굴복하고 김종필의 귀국을 3월 27일 명령한다.
마침내 박정희는 3월 28일 한일회담 유보 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미국은 4월 9일 존슨 대통령이 직접 나서 “미국 정부는 계속해서 회담의 타결을 희망하고 있다”라고 공표하는 등 박정희 정권에게 계속해서 압력을 넣었다.
미국은 소련과 중국에 대항하여 한·미·일 삼각 안보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양국의 국교 정상화가 필요했다.
또한, 인도차이나와 말레이반도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전략적 자원확보를 위해서도 한일관계 정상화는 미국의 든든한 후방이자 자금줄이었다.
프랑스를 대신한 미국의 인도차이나 식민 점령 시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은 전쟁 초기에 점령한 프랑스 식민지인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했다.
인도차이나는 식민 지배를 끝장내고 민족해방혁명으로 새로운 삶을 쟁취했다. 호찌민이라는 공산주의자가 이끄는 혁명가들은 일본에 맞서 싸웠고, 일본인들이 철수한 1945년 말에 하노이에서 100만 명의 인파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1946년 10월에 베트남 북부 항구도시 하이퐁을 폭격함으로서, 베트남독립동맹운동과 프랑스 사이에 8년 전쟁이 벌어졌다.
미국은 1954년까지 인도차이나에 주둔하고 있는 프랑스 군대 전체를 무장시키기에 충분한 소형화기와 기관총 30만 정 그리고 10억 달러를 제공했다. 모두 합해 미국은 프랑스의 전쟁 수행 비용의 80%를 부담했다.
특히 미국은 베트남을 포함한 인도차이나 지역은 쌀, 고무, 석탄, 철광석 등을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라 판단했다.
그뿐만 아니라 말레이반도와 인도네시아는 천연고무와 주석의 세계적인 주산지이자 석유를 비롯한 전략적으로 중요한 상품의 생산지이므로, 도미노 이론(한 나라가 공산주의에 굴복하게 되면 다음 나라도 똑같이 굴복하고 이런 과정이 계속 이어진다는 논리)에 따라 베트남의 공산주의를 우선 막아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일 국교 정상화는 미국의 향후 베트남 점령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학생과 민중은 박정희의 결정이 일시적 유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4·19혁명일을 시점으로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한일 굴욕외교 반대 6·3항쟁
5월 20일 서울대학교 문리대에서는 “한일굴욕외교 반대 학생총연합회” 명의로 박정희와 김종필이 주장한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을 개최했다. 그리고 시위는 문리대생들이 단식 투쟁을 하면서 6월 초부터 격렬해졌다.
6월 3일 정오, 비가 내리는 가운데 학생과 민중 약 2만 명이 곳곳에서 바리케이드를 부수고 최루탄을 발사하는 경찰과 충돌, 유혈극을 벌이면서 도심으로 진출했다. 대학생 7,000~8,000여 명이 중앙청 앞으로 몰려들면서 세종로 일대는 혼란에 빠졌고 국회의사당을 점령하기까지 했다. 중앙청 앞의 바리케이드는 이미 무너졌고 경찰은 청와대로 올라가는 통의동 앞에 저지선을 만들어 놓았다.
서울의 다른 지역에서는 경찰서가 피습되고, 학생들은 네 군데의 교통관제탑을 점거하여 독자적으로 교통통제반을 조직했다. 일부 학생들은 군용트럭 10여 대를 탈취하여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시내를 활주했다. 연도의 민중들은 행진하는 학생들에게 환호를 보냈으며 상당수는 대열에 합류했다.
일부 대학생들은 박정희·김종필 민생고(民生苦) 화형식과 일본 총리 이케다 하야로 화형식, 그리고 오일육(吳一陸) 피고에 대한 모의재판을 열고 박정희 정권을 성토하였다.
서울 이외의 대도시에서도 시위가 전개되었는데 그 핵심적인 구호는 “박정희의 퇴진”이었다.
광주에서는 전남대와 조선대 그리고 2개의 고등학교 학생 1만여 명이 최루탄을 쏘는 경찰에 맞서 2개의 파출소와 도청 건물, 그리고 경찰이 만든 민주공화당 본부에 돌을 던졌다.
고립상태에 빠진 박정희는 미군 헬리콥터를 타고 청와대에 온 버거 대사와 해밀턴 하우즈(Hamilton H. Howze) 주한미군 사령관과 회담했다.
박정희는 회담 후 9시 40분에 선포하기로 한 계엄령을 오후 8시로 소급하여 서울시 전역에 대해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계엄사령부는 포고령 제1호를 발표한다.
옥내·외 집회 및 시위를 금한다. 언론, 출판, 보도는 사전 검열을 받아야 한다. 일체의 보복행위를 금한다.
6·3항쟁의 진압 배후 미국과 윤석열 반역의 시대
미국은 5·16쿠데타 때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5·16군부 반란 진압에 군대가 출동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런데, 미군사령부는 6·3항쟁을 탄압하기 위한 군대 출동을 허가했다.
5·16쿠데타와 마찬가지로 6·3항쟁에서도 미국은 박정희를 도우면서 철저히 꼭두각시로 이용했다.
6·3항쟁의 진압 배후는 미국이다! 윤석열 반역의 시대를 사는 대가로, 금수강산에 조선 얼굴을 한 일본 놈과 미국 놈들이 활보하고 있다. 민족혼과 국격은 땅에 파묻히고, 오로지 미국을 신으로 추앙하고 있다. 그러나 민중은 전 지구적 미 제국의 고립과 쇠퇴 과정을 보고 있는데, 위정자들은 아직도 영원한 미 제국으로 추앙하며 하수인으로 주구로 맹종하고 있다. 미국 신식민 78년, 꼭두각시로 살 것인가!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 반제·자주·평화애호 세력은 총단결하라!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6.3항쟁 관련기사목록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