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링컨이 찾아오자 사우디가 웃었다
최근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 앞에서 굴욕·수모라고 할 정도로 저자세 외교를 이어가고 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지난 6일(현지 시각)부터 8일까지 사우디를 방문했다.
블링컨 장관은 먼저 6일 제다에서 사우디의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살만 알 아사드 왕세자를 만나 “우리는 누구에게도 미국과 중국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이 만남에서 양국은 이란·수단 문제에서부터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 사우디와 이스라엘의 관계 정상화 문제, 지역 사회기반시설, 청정에너지 등 다양한 현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날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인권 문제를 거론하며 사우디를 ‘국제 왕따’로 몰아갔을 때와 비교하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미국은 블링컨 장관의 방문에 맞춰 사우디에 통 큰 선물을 안겨주기도 했다.
지난 6일 미국 프로 골프 PGA 투어와 LIV 골프의 합병 소식이 들려왔다. 사우디는 석유 판매로 쌓아올린 780조원에 이르는 국부펀드를 활용해 지난 2021년 10월 미국에서 LIV 골프를 출범시켰다. 하지만 1916년 출범한 ‘원조’ PGA가 버티고 있어 영향력을 뻗치기에는 한계가 있는 상황이었다. LIV 측이 막대한 자금력을 앞세워 유명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자 PGA 측이 반발하는 등 양측의 신경전도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 블링컨 장관의 사우디 방문에 맞춰 갑작스러운 합병 발표가 나온 것이다. 사우디 측은 신설될 통합 프로 골프 이사회의 이사장을 맡게 돼 미국 프로 골프에서 강력한 입지를 확보했다.
이는 사실상 미 정부가 앞장서서 사우디가 미국 프로 골프를 장악하도록 ‘꽃길’을 닦아준 것으로, 미국이 사우디에 백기를 들고 투항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하제현, 「[글로벌 이슈] 프로골프 판세 엎은 오일머니」, 중소기업뉴스, 2023.6.12.)
그런데 미국이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사우디에 유리한 프로 골프 통합 발표를 할 이유는 딱히 없었다. 사우디가 석유를 감축해달라는 바이든 대통령의 요청을 무시하고 미국에 엇서며 중국·러시아와 밀착하는 행보를 해왔기 때문이다.
중동에서 떠날 수 없는 미국 처지 이용한 사우디
블링컨 장관은 사우디 방문 이틀째인 7일에는 사우디가 주최한 미·걸프협력회의 장관급 회의에 참석했다.
블링컨 장관은 중동 각국 외교부 장관들 앞에서 “미국은 중동을 떠나지 않았다”라면서 “우리는 여러분(걸프협력회의에 소속된 중동 각국)과 협력 관계를 맺기 위한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라며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사우디는 블링컨 장관의 방문에 맞춰 미국으로서는 결례라고 느낄 만한 행보도 서슴없이 했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블링컨 장관과 만난 지난 6일 미국이 보란 듯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과 제다에서 만났다. 또 사우디는 같은 날 사우디 주재 이란 대사관을 7년 만에 다시 열어 미국과 적대해온 이란과의 국교를 완전히 정상화했다.
베네수엘라와 이란은 사우디와 마찬가지로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하는 경제협력체 브릭스의 가입을 추진하고 있다는 공통점도 있다. 브릭스는 미국이 주도해온 G7, G20의 대항마로 꼽힌다.
지난 8일 파이살 빈파르한 사우디 외교부 장관은 블링컨 장관과 연 공동 기자회견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위한 평화가 이룩되지 않는 한 (사우디가) 이스라엘과 관계 정상화로 얻는 이익은 제한적일 것”이라며 미국에 경고성 일침도 날렸다. 이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의 편을 들며 팔레스타인의 참상에 눈 감은 점을 꼬집은 것이다.
다음날인 9일 사우디와 미국은 수단에서 두 달 가까이 내전이 벌어지는 것과 관련해 공동성명을 통해 수단 정부군과 신속지원군이 ‘24시간 휴전’을 하도록 중재했다고 발표했다. 미국이 지난 6일 무함마드 왕세자와 한 약속을 이행한 모양새다.
사우디와 미국은 “양측은 휴전 기간에 병력 이동과 공격, 항공기와 무인기 동원, 공습, 포격, 병력 증강 배치를 삼가고, 휴전을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행위도 자제하기로 했다”라면서 “만약 휴전 약속을 어기는 경우, 그 위반자를 제다에서 열리는 회담에서 강제로 배제하는 방안을 고려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사우디가 중동과 가까운 북아프리카 이슬람권 지역에서 평화 중재자로 나선 것으로 사우디의 국제적 입지가 커졌다는 평가다.
블링컨 장관의 방문 과정에서 사우디는 큰 성과를 올린 반면, 미국으로선 여러모로 망신살이 뻗쳤다고 할 만한 장면이 펼쳐졌지만 미국은 아무런 대응조차 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지난 8일 뉴욕타임스는 지난 몇 달 동안 바이든 대통령과 그의 핵심 참모들이 중국, 러시아와 경쟁해야 하는 냉엄한 지정학적 현실을 받아들였다고 꼬집었다. 중국, 러시아의 대결에서 힘에 부치는 미국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사우디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는 시각이다.
국내 언론과 주요 외신들도 사우디가 외교와 골프 분야에서 미국에 승리했다고 평가했다. 사우디로선 중동에서 떠나지 못하는 미국의 처지를 역이용해 외교전에서 승리를 거둔 셈이다.
사우디의 승리는 각국이 외교 전략에 따라 미국 등 강대국에 맞서 국익을 챙길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로 남게 됐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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