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일정상회담 얘기가 계속 나온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속해서 북일정상회담에 의욕을 보인다.
기시다 총리는 2021년 10월 취임 직후 “조건 없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직접 마주할 각오가 되어있다”라고 하였으며 2022년 9월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도 “전제 조건 없이 (북한을) 만날 준비가 돼 있다”라고 밝혔다.
올해 5월 27일 일본인 ‘납북자’ 귀국을 촉구하는 집회에서도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북일정상회담을 조기에 실현하기 위해 북한과 고위급 협의를 하기를 원한다”라고 발언했다.
일본 총리의 거듭된 정상회담 요청에 북한도 반응을 보였다. 5월 29일 박상길 북한 외무성 부상은 담화를 통해 “만일 일본이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변화된 국제적 흐름과 시대에 걸맞게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대국적 자세에서 새로운 결단을 내리고 관계 개선의 출로를 모색하려 한다면, 조일[북일] 두 나라가 서로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공화국 정부의 입장”이라고 하였다.
전제조건이 있기는 하지만 대화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북한이 공식적으로 북일 대화를 언급한 것은 2016년 이후 처음이다. 특히 미국이나 한국의 대화 요청은 여지조차 주지 않거나 아예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다.
이에 힘입었는지 기시다 총리는 6월 8일 참의원 재정금융위원회에 참석해 “모든 기회를 놓치지 않고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조기에 실현하기 위해 총리 직할의 고위급 협의를 위한 노력을 계속하겠다”라며 거듭 회담 의지를 밝혔다.
북한이 일본의 대화 제안을 묵살하지 않고 반응을 한 것을 보면 북일 사이에 물밑 접촉이 있지 않았나 추정이 가능하다. 원래 정상적인 국가관계가 아닌 경우 대화를 하려면 물밑 접촉을 통해 서로 생각을 타진한 후 공식 대화로 넘어간다. 그리고 물밑 접촉 과정에서 서로의 의도를 분명히 하거나 상대를 압박하기 위해 은근히 공개적인 행보를 하기도 한다. 기시다 총리의 발언은 북한 측 협상 상대에게 신뢰를 주기 위한 조처일 수 있으며, 북한의 담화는 일본 측 협상 상대에게 대화의 전제조건을 공개적으로 밝혀 압박하는 조처일 수 있다.
일각에서는 북일 사이에는 통로가 없어서 아직은 물밑 접촉을 하지 못하고 있으리라고 분석한다. 하지만 북일 사이에는 훌륭한 물밑 접촉 통로가 있다. 바로 북한에서 식당을 하는 후지모토 겐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속 요리사로 유명한 후지모토는 2016년 4월 방북했을 때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만나 북일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후지모토가 북한과 일본의 가교가 되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일본으로 돌아간 후지모토는 아베 신조 총리를 만나려고 시도했지만 일본 정부는 그를 무시했다. 이후 그는 평양 낙원백화점에 일본음식점을 차렸다.
만약 일본이 북한과 물밑 접촉을 하고자 한다면 후지모토를 찾아갔을 것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인연이 있는 후지모토는 일본의 의중을 북한에 직접 전달할 수 있는 인물이다.
어찌 됐든 기시다 총리는 북일정상회담에 상당한 의욕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개인의 욕심이라기보다는 미국의 요구가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원래 한국이나 일본의 대북 정책은 미국의 지휘 아래 이루어지는 게 기본이다. 작년에 기시다 총리가 유엔 총회에서 북일정상회담을 언급했을 때도 미 국무부 대변인실 관계자는 “북한을 대화에 관여시키려는 일본과 다른 나라의 노력을 지지한다”라고 밝혔다.
사실 북한과 대화를 하고 싶은 건 미국 자신이다. 미국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한에 ‘전제 조건 없는 대화’를 요청했다. 하지만 북한은 여러 차례 미국과 더 이상 대화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미국이 북한과 대화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때 보통 한국 정부를 앞세우는데 윤석열 정권 들어서는 그 방법도 통하지 않는다. 아마 윤석열 대통령 본인도 북한과 대화를 하고 싶어 다양한 시도를 해봤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게 “인간 자체가 싫다”라는 말까지 들으며 수모를 당했을 뿐이다.
그래서 미국은 일본을 통해 대화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북한을 만나려는 것은 북한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한 것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요구가 있다.
● 북한과 중국을 갈라놓으려는 미국
당장 미국에 급한 문제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다. 북한이 태평양에 미사일을 발사할 때마다 미국은 미사일이 본토까지 날아올지 몰라 긴장해야 한다. 이를 막기 위해 미국은 어떻게든 북한과 만나려고 한다.
좀 더 장기적인 문제로 넘어가 보면 중국 문제가 있다.
미국은 지난해 발표한 새 국가안보전략에서 중국을 “국제 질서를 재편하려는 의도와 능력을 지닌 유일한 경쟁자”라고 규정하고 미국 안보 전략의 핵심 목표로 “중국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고 러시아를 억제하는 것”을 내걸었다. 이는 중러를 미국에 도전하는 수정주의 국가로 규정한 2017년 국가안보전략에서 더 나아간 것이다.
중국의 성장은 미국을 극도로 위협하고 있다. 미국식 독점자본주의 체제는 1등만 살아남는 세상이기 때문에 만약 중국이 미국을 능가하면 미국은 그대로 몰락할 것이다. 공존, 공영을 선택할 줄 몰라서 생기는 문제다.
미국은 지금도 이미 중국 때문에 자기의 구상이 번번이 깨진다고 여긴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부추기면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몇 달만 버티면 대러 제재로 러시아 경제가 무너지면서 이길 수 있다고 설득했을 것이다. 미국이 보기에 ‘침략자’ 러시아를 제재하자고 요구하면 전 세계가 동참할 것이고 그러면 과거 이라크처럼 순식간에 러시아 경제가 무너지리라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예상은 빗나갔다. 미국이 동맹이라 여긴 인도, 일본도 미국 말을 듣지 않았다. 인도는 말할 것도 없고 일본마저도 대러 제재에 동참한다고 하고서는 러시아와 분쟁 중인 쿠릴 4개 섬 문제 해결을 위해 러시아 석유, 가스 수입을 계속했다.
지난해 일본의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량은 재작년보다 4.6% 증가했다. 제재하기 전보다 수입을 늘린 것이다. 지금 일본이 수입하는 천연가스 가운데 러시아산 비중이 거의 10%를 차지하는데 이 대부분은 사할린-2 프로젝트에서 생산된 천연가스다. 그리고 사할린-2 프로젝트 지분의 22.5%를 일본 미쓰이물산과 미쓰비시상사가 보유하고 있다. 즉, 일본은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겉으로는 대러 제재에 동참한다고 하고서 실질적으로 불참하고 있다.
심지어 일본은 주요 7개국(G7), 유럽연합, 호주가 시행하는 러시아산 석유 가격 상한제에서도 발을 빼고 가격 상한보다 배럴당 10달러 가까이 더 비싼 가격에 석유를 구입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은 러시아산 석유를 사고 싶어도 가격 상한제 때문에 못 사는 것과 대조적이다. 최근 일본 경제 성적이 좋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와 관련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국이 볼 때 대러 제재의 가장 큰 구멍은 중국이다. 중국은 아예 대러 제재에 공식 불참하면서 러시아 경제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그러니 망할 줄 알았던 러시아 대신 미국이 망할 판이 된 것이다. 미국이 중국을 하루빨리 무너뜨려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미국이 중국을 제압하기 위해 꺼낸 핵심 수단 가운데 하나가 ‘탈동조화’다. 간단히 말해 전 세계 나라들이 중국과 경제를 단절하는 것이다. 특히 핵심 산업이라 할 수 있는 반도체 산업에서 중국을 철저히 고립시키자는 게 미국의 구상이다.
그런데 이조차 미국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미 중국과 밀접한 경제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들이 국익을 포기하면서까지 미국의 말을 듣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 프랑스, 유럽연합 등 여러 나라들이 중국과 손을 잡았고 탈동조화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미국의 주요 기업 경영진도 앞다퉈 중국을 방문했고 경제 관료들도 나서서 ‘실은 탈동조화할 생각 없다’고 꼬리를 내렸다. 이제는 탈동조화 대신 ‘위험완화(디리스킹)’라는 말을 쓰고 있다. 현재까지 미국의 탈동조화에 충실한 나라는 한국밖에 없는 듯하다.
전 세계 나라들이 다시 탈동조화에 나서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중국을 악마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 악마화의 가장 손쉬운 방법은 전쟁이다. 중국이 대만을 공격하면 ‘침략자’ 중국과 거래를 끊으라고 각국에 강요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우크라이나 전쟁을 명분으로 대러 제재에 주저했던 나라들을 압박한 것과 마찬가지다. 냉전 해체 후 각국이 미국의 영향에서 벗어나려 하자 9.11테러를 명분으로 ‘테러와의 전쟁’에 각국을 줄 세운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이런 이유로 지금 미국은 대만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이대로 대만에 전쟁이 발발하면 북한이 움직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단 전쟁이 나면 중국은 미군의 대만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평택, 군산 등 중국에 가까운 지역에 있는 주한미군기지나 성주 사드 기지를 공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북중 우호·협조 및 상호원조 조약 제2조 “침략을 방지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하고 “전쟁이 발생하면 조약 상대방은 모든 힘을 다해 지체없이 군사·기타 원조를 제공”한다는 약속에 따라 북한이 주한미군을 대신 공격할 수도 있다. 많은 전문가가 대만 전쟁 발발 시 한반도에도 전쟁이 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렇게 되면 전쟁이 한반도와 대만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미국과 북한이 직접 군사적으로 충돌하면 북한의 핵미사일이 미국 본토에 쏟아진다. 미국은 이를 감당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북한과 중국을 이간질해 대만 전쟁이 발발해도 북한이 중립을 지키게 만들려 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바이든 정부 들어 추진한 정책이 아니라 트럼프 정부 때부터 줄기차게 노력한 정책이다.
‘분열시켜 통치하라’는 제국주의 국가의 오래된 정책이다. 소련을 고립시키기 위해 중국과 수교하여 중소 갈등을 부추긴 것처럼 중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북한을 포섭하려는 미국의 이간책은 2018년에 정점을 찍었다.
2017년까지 북한과 중국은 전례 없는 갈등을 겪었다. 중국은 북한의 핵개발을 공개 비난하면서 대북 제재에 동참했고, 북한은 공개적으로 중국을 거론하며 대국주의 행태를 규탄했다. 트럼프 당시 미 대통령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북중관계에 쐐기를 박기 위해 북미정상회담을 추진했다. 그런데 북미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한 뒤에 북한이 북중정상회담을 전격 개최해 미국의 허를 찔렀다. 북한과 중국의 지도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상호 존중과 단합을 강조했다. 분노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북미정상회담을 취소하며 북한을 압박했지만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2019년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북미정상회담에서 양국은 끝내 합의를 이루지 못했고 북미관계는 지금껏 단절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미국이 ‘북중 이간책’을 쉽게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든 북한과 다시 대화를 재개하고 싶지만 북한이 전혀 기회를 주지 않으니 일본이라도 시켜서 대화를 추진하자는 게 미국의 구상인 듯하다.
● 한·미·일 공조에 균열을 일으키려는 북한
북한도 미국의 이런 구상을 뻔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북한이 일본의 대화 요청을 묵살하지 않고 반응을 보인 것은 북일 대화를 이용할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북중관계를 갈라놓으려는 미국의 구상을 알면서도 2018년 북미정상회담을 진행한 북한의 주된 목적은 북한의 핵보유 명분을 확보해 핵보유국 지위, 전략국가 지위를 실질적으로 굳히고 평화협정 체결에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북한은 북일 대화를 통해서도 어떤 성과를 노리고 있을 것이다.
만약 북일 대화가 시작되고 협상이 잘 진행되면 북일관계 정상화까지도 가능하다. 설사 북일 수교까지 나아가지는 못하더라도 협상을 진행하는 동안에는 상호 주권을 존중하고 서로를 자극하는 행위를 삼가게 된다. 그러면 북한을 겨냥한 한·미·일 공조에 균열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이번에 북한이 정찰위성을 발사했을 때 한·미·일이 한목소리로 북한을 규탄했는데 만약 북일 대화가 진행 중이었다면 일본은 협상 유지를 위해 목소리를 낮춰야만 했을 것이다. 즉, 한·미·일 공조에 금이 가는 것이다.
중앙일보 6월 9일 자 보도에 따르면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한국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탄생해 한일, 한·미·일의 안전보장 연계가 강해지는 가운데 북한이 분단 공작을 준비해 왔을 가능성도 있다”라고 분석했다고 한다. 일본 역시 북일 대화가 한·미·일 공조를 흔들까 우려하고 있다.
북한은 일본을 강하게 끌어당기기 위해 몇 가지 선물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을 향한 미사일 발사를 유예하는 식으로 일본의 안보 우려를 줄여줄 수 있다. 북한이 미사일을 쏠 때마다 국민 대피령을 내리는 일본 처지에서는 꽤 큰 선물이다.
경제적 선물도 가능하다. 북한에는 일본이 탐내는 자원이 많은데 특히 희토류가 큰 선물이 될 것이다. 일본은 첨단 산업에 필수 자원인 희토류를 전량 수입하는데 특히 중국에서 60%를 수입하고 있다. 2010년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 열도) 영유권을 둘러싸고 중국과 일본이 갈등할 때 중국이 대일 희토류 수출을 제한하자 곧바로 꼬리를 내린 경험이 있는 일본은 북한의 희토류 개발권을 따낼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고 싶을 것이다. 북한 희토류 매장량은 세계 1, 2위를 다툰다고 한다. (「북한 희토류 매장량, 알고보니 세계 2위」, 시사인, 2012.11.26.)
일본을 이용해 북·중·러 공조를 깨려는 미국, 이를 역이용해서 한·미·일 공조를 깨려는 북한, 그 사이에서 나름의 잇속을 챙기려는 일본. 지금 한반도를 둘러싸고 치열한 외교전이 펼쳐지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오로지 한·미·일 공조를 외치며 반북, 반중, 반러의 돌격대를 자처하는 윤석열 정권의 모습에서는 나라의 희망을 찾아볼 수 없어 불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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