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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혁명과 민중봉기 그리고 촛불항쟁은 계속된다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기사입력 2023/07/13 [15:04]

[기고] 혁명과 민중봉기 그리고 촛불항쟁은 계속된다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입력 : 2023/07/13 [15:04]

지난 6월 28일 윤석열은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한국자유총연맹 제69주년 창립기념 행사’에서 “조직적으로 지속적으로 허위 선동과 조작 그리고 가짜뉴스와 괴담으로 자유 대한민국을 흔들고 위협하며 국가 정체성을 부정하는 세력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중략) 왜곡된 역사의식, 무책임한 국가관을 가진 반국가 세력들은 핵무장을 고도화하는 북한 공산집단에 대하여 유엔 안보리 제재를 풀어달라고 읍소하고, 유엔사를 해체하는 종전선언 노래를 부르고 다녔습니다”라고 주장하면서 ‘역사전쟁’에 불을 붙였다. 

 

▲ 한국자유총연맹 행사에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     

 

이어 윤석열 정부와 여당은 윤석열의 ‘국가 정체성 부정 세력’, ‘반국가 세력’ 발언이 떨어지자마자 아부 충성 경쟁을 하고 있다.

 

먼저 국가보훈부 장관이란 자는 지난 6일 CBS라디오에서 “백(선엽) 장군은 친일파가 아니다. 제 직을 걸고 이야기할 자신이 있다. …중략… 백 장군이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만주에는 독립군이 없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보훈부는 백선엽 등의 국립현충원 안장 기록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표현을 삭제하는 방안도 추진한다고 한다.

 

또한 여당도 지난 5일 백선엽 3주기 추모식 겸 동상 제막식에 총출동해 공적을 찬양했다. 특히 원내대표란 사람은 “이승만 대통령께서 건국의 아버지셨다면, 백선엽은 건군의 아버지셨다”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상근부대변인은 지난 8일 논평에서 “문재인 정부 시절, 국립현충원 안장 기록에 친일파 문구를 넣는 과정에 국방부가 동참했던 것으로 확인됐다”라며 백선엽의 친일 행적 기재에 동의한 당시 국방부를 비난했다.

 

그뿐만 아니라 여당 대표란 인간은 지난달 29일 SNS에서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한 대한민국의 초석을 놓은 이승만 대통령의 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발족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중략… 이승만 대통령을 바로 알리고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자유민주주의의 정체성과 공정한 법치를 다시 바로 세우길 바란다”라고 밝혔다.

 

벌써 내년 총선을 겨냥해서 독재자와 친일파를 찬양하는 목소리가 윤석열과 정부·여당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소위 ‘국가 정체성 바로 세우기’로 포장해서 이승만과 백선엽을 숭배하는 수구세력의 표를 모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럼, 수구세력들이 또다시 찬양하고 나선 이승만과 백선엽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

 

이승만 사대 친미 독재 범죄행위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으로 조국을 분단시킨 원흉이자 1960년 4.19혁명으로 이미 민중으로부터 단죄받아 쫓겨난 인물이다.

 

▲ 1960년 5월 29일 오전 이승만이 부축을 받으며 망명길에 오르는 장면. 

 

그리고 이승만이 일제 강점하에서 하였다는 독립운동은, 독단적 행동으로 항일운동 세력의 분열만 일으킨 분열주의였다.

 

또한 해방공간에서 이승만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해산시키고 친일파들을 대거 등용한 친일파의 아버지이다.

 

특히 이승만의 미국에 대한 충성심은 1948년 9월 1일 한국에 대한 미국의 착취를 제도화해 주는 ‘한미 재정 및 재산 이양에 관한 협정’ 체결을 위해 한 아래 발언에서 잘 드러나 있듯이 사대 숭미(崇米)주의자이다.

 

“미국 측 제안대로 전부 동의하라. 미국의 힘으로 정부가 세워졌고 앞으로도 미국의 힘에 의하여 유지될 우리 정부가 미국 사람들의 비위를 거슬러 가면서 그들의 그만한 요구를 거부할 수 있겠는가.” (한동혁 엮음, 「안재홍 유고집」, 『지배와 항거』, 힘, 1988.)

 

그뿐만 아니라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 이후 서북청년회 등 정치 깡패를 이용한 정적 탄압, 제주 4.3사건, 보도연맹 학살과 같은 민간인 학살사건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민중을 죽인 학살책임자이다.

 

이승만은 1949년 제헌국회 내의 일부 소장파 국회의원들이 외국군 철수와 평화통일을 주장한다고 남조선노동당의 국회 내 프락치로 몰아 대거 구속하고, 무엇보다 민족통일 세력에 대한 영원한 전쟁을 선포한 국가보안법을 제정한 반인권·반민주 범죄자이다.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주장하여 6.25전쟁을 유발하게 하였으며 한강 인도교 폭파,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 부산정치파동 등 전쟁 중에도 책임회피만 한 보신주의자이다. 

 

그리고 이후 이승만의 독재 범죄행위는 사사오입 개헌, 진보당 사건과 당수 조봉암 사법살인, 3.15부정선거, 4.19혁명 당시 115명의 사망과 수천 명의 부상 등 민주주의와 인권을 짓밟은 범죄행위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백선엽의 친일 행각

 

백선엽은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수많은 독립군을 학살한 악명 높은 간도특설대 중위 출신이다.

 

© 미디어오늘

 

일본은 1932년 중국 동북 지방(만주)에 괴뢰국 만주국을 세운다. 간도특설대는 만주국 육군 소속의 조선인 부대로 연변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토벌이 주 임무였다.

 

동북항일연군은 1935년 8월 1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가 8.1선언을 통해 모든 민족, 모든 계층의 항일연합군 창설을 결의한 것에 따라 중국 인민해방군 소속 동북 방면 다민족 부대로 이루어졌다. 

 

간도특설대에 대해서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2009)은 “일제의 패망으로 해산될 때까지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에 대해 모두 108차례 ‘토공(討攻)’ 작전을 벌였다.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했으며, 그 밖에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강간·약탈·고문을 당했다”라고 하였다.

 

또한 간도특설대는 정규 야전 부대가 아니라 특수부대로 먼저 활동 지역에 잠입하여 정탐 활동을 벌인 후, 무장 본대가 투입되어 토벌하는 방식으로 독립군 협력자까지 색출해 처단하면서 악명이 높았다. 

 

백선엽에 대한 일제 강점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만주국이 초급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펑톈(奉天)에 세운 중앙육군훈련처(봉천군관학교)에 1940년 3월 입학해서 1942년 12월에 제9기로 졸업하고 견습군관을 거쳐 1943년 4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했다. 자무쓰(佳木斯)부대를 거쳐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했다. 1943년 12월 러허성(热河省)에서 간도특설대 기박련(機迫連: 기관총·박격포중대) 소속으로 팔로군 공격작전에 참가했다. 일제 패망 당시 만주국군 중위였다” (『친일인명사전』)

 

2009년 11월 대통령 소속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백선엽이 만주국 군대의 간도특설대에서 항일세력을 탄압한 이력을 들어 그를 친일파로 규정했다. 

 

백선엽도 1993년 일본에서 출간한 『대 게릴라전-미국은 왜 졌는가』라는 책에서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중략…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라고 고백했다. 

 

이런 명백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윤석열의 말 한마디에 정부·여당은 맹목적으로 거짓 선동을 하고 있다. 

 

4·19혁명과 부마항쟁, 5·18광주항쟁, 6월항쟁 그리고 남북공동선언들

 

한국 현대사는 대체로 10년을 주기로 혁명과 민중봉기 그리고 촛불항쟁이 일어났다.

 

1948년 8월 15일 분단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의 폭정에 맞선 민주주의와 통일에 대한 열망은 1960년 4.19혁명 ‘제2의 해방’으로 분단 모순을 해결할 기회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1961년 5.16 박정희 군사쿠데타로 반공 독재가 부활하였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랄까, 1972년 ‘7.4남북(북남)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분단 이후 최초로 조국통일 원칙에 합의하는 진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1972년 10.17유신쿠데타로 또다시 민족통일 문제는 후퇴하게 된다.

 

이후 중앙정보부의 정보·공작 정치와 군인들 세상에 대한 민중의 저항은 1979년 부마항쟁과 10.26으로 영구 집권을 꿈꾸었던 유신체제와 극단적인 반공주의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1980년 미국을 등에 업은 신군부의 5.18광주학살로 전두환 파쇼독재가 등장했다.

 

하지만 5.18광주항쟁 이후 신군부와 민주화 세력의 격돌은 1987년 6월항쟁으로 대통령 직선, 5년 단임제인 6.29항복선언을 받아낸다. 그러나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신군부 세력 노태우에게 패배함으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 문제는 또다시 퇴행하게 된다.

 

▲ 6월항쟁     © 자주시보

 

다행히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향한 민중의 열망은, 분단 55년 만에 남북 정상인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손을 잡게 했다. 2000년 6.15남북(북남)공동선언으로 조국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하자는 대원칙에도 합의한다. 이어 노무현 대통령도 항공로가 아닌 승용차를 이용하여 육로로 방북하여 2007년 10월 4일 ‘남북(북남)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집권 여당의 분열과 총체적 관권 부정선거로 2008년, 2013년 이명박과 박근혜에게 연거푸 정권을 빼앗기고, 나라는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과 세월호 의혹 사건으로 최악의 정국 혼란을 맞이한다.

 

혁명과 민중봉기 그리고 촛불 항쟁은 계속된다.

 

민중은 이명박근혜 9년 동안 사악하고 무능한 사대 매국 반통일 부패 정권 아래에서 고통받아야 했다. 

 

그러나 어둠은 빛을 이길 수가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민중은 촛불 항쟁으로 박근혜를 탄핵했다.

 

하지만 문재인은 촛불 정신을 망각하고 적폐 청산과 사회 대개혁에 무기력하게 대응하다, 윤석열 검찰 집단에게 정권을 빼앗기게 된다.

 

윤석열과 정부·여당 그리고 심복 검찰들이 1년 동안 행하고 있는 사대 매국 종미 친일 행각은 전쟁 위기와 민중 생존 그리고 먹거리 및 안전을 직접 위협하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보다 더한 역주행이 지난 1년 동안에 끊임없이 진행됐다.

 

하지만 어떤 정권도 민중의 저항을 이겨낸 정권은 없었다.

 

대통령의 자리는 국민 위에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다!

국민 아래에서 국민을 걱정하고 국민을 위해서 존재하는 자리다!

정신 차려라!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

반제·자주·평화애호 세력은 총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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