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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통이 큰 여걸 안경자 여사를 추모하며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기사입력 2023/09/21 [15:16]

[기고] 통이 큰 여걸 안경자 여사를 추모하며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입력 : 2023/09/21 [15:16]

고귀한 노동으로 번 돈을 통일운동과 병마로 고통받는 동지들을 위해 후원하였던 안경자 여사가 17일 오후 11시경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3세.

 

안경자 여사의 추모식은 19일 범민련 남측본부, 남민전 동지회, 사월혁명회, 양심수후원회, 추모연대, 진보연대 등으로 장례위원회를 꾸려 ‘애국지사 故 안경자 선생 민족통일장’으로 고인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되었다.

 

© 한찬욱

 

© 한찬욱

  

 

부군 남민전 전사 황금수 선생

 

안경자 여사의 부군은 ‘남민전 사건’으로 징역·자격정지 15년을 받고 1988년 12월 출소한 황금수 선생이다.

 

황금수 선생은 해방공간 1948년과 1961년 5.16쿠데타로 2번 체포된다. 그리고 1950년, 1974년, 1979년 3번의 구속으로 고문이란 고문은 다 받아 몸은 거의 만신창이였다. 특히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당하였을 때는 3차 신경통까지 걸려 엄청난 병마 속에 수감 생활을 한다.

 

시인 박용구는 『화려한 식민지: 시인 박몽구의 세태추적기』에서 황금수 선생의 심각한 옥중 투병 실태를 고발한다.

 

“현재 전주교도소에서 남민전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복역해 온 황금수 씨(50)도 심한 고문 후유증으로 병고에 허덕이고 있다. 황 씨는 진단 결과 견디기 힘든 통증이 따르는 안면마비 현상의 ‘3차 신경통’을 앓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때문에 하나둘씩 이가 빠지기 시작해 지금은 음식물을 전혀 씹을 수 없는 상태로 겨우 미음에만 의지해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천주교 평화신문은 황금수 선생의 아내 지춘란과 아들 원의 가족사진과 남민전 사건으로, 병마로 고통받는 선생의 수감 기사를 전면에 대서특필한다.

 

그리고 이 신문을 본 안경자 여사는 황금수 선생이 징역을 살고 나오면, 자기가 아내 노릇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한다. 

 

 

황금수 선생의 첫 부인 지춘란 여사

 

황금수 선생의 첫 부인인 지춘란 여사는 1931년생으로 중국 용정 출신이다.

 

지춘란은 길림성에서 중국인민해방군 위생원으로 입대하여 만주에서 중국 국공내전에 참가한다. 그리고 6.25전쟁에 조선인민군으로 중앙병원에 소성(소위)으로 배치되어 1951년 2월경 강원도 횡성에서 대남 유격대 제3지대 간호장으로 편입된다. 

 

이후 전설의 빨치산 대장 남도부가 지휘하는 조선인민군 유격대 제3지대의 간호장으로 미군, 국방군과 싸우다 1954년 1월 20일 대구 팔공산 아지트에서 체포된다.

 

지춘란은 국방경비법 32조 위반으로 사형을 언도받고, 1960년 4.19혁명으로 형량이 감형되어 1968년 출소한다.

 

그리고 사회대중당 최만리 여성위원장이 서울 구치소에서 복역하다가 알게 된 지춘란 여사를 황금수 선생에게 소개해 두 분은 결혼한다. 

 

그러나 지춘란 여사는 빨치산 투쟁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어 아이를 입양하여 키운다. 이후 부군인 황금수 선생이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되자 옥바라지와 아들 원을 키우다 1984년 의문사 당한다.

 

 

안경자 여사, 황금수 선생과 친구로 애인으로 동지로 부부로 산상 결혼하다

 

황금수 선생이 1988년 출소하자 안경자 여사는 서상호(2023년 6월 운명) 선생을 통해 자연스럽게 기존 당신들의 등산모임에 합류하도록 한다.

 

그리고 마침내 1990년 11월 황금수 선생과 안경자 여사는 북한산에서 산상 결혼을 한다.

 

결혼 당시 박창균(2012년 3월 영면) 목사가 안경자 여사에게 두 분이 어떻게 해서 결합하게 되었느냐고 질문을 하니, 여사는 자기가 선택했다고 말한 일화가 있다.

 

그래서 박창균 목사는 “선택을 한 사람도 위대하지만 선택을 당한 사람도 더욱 위대하다”라고 말한다.

 

결혼 주례사로 문한영 선생 그리고 김남주 시인이 자작시 낭송을 하고 권오헌 선생이 사회 등을 한다.

 

축사 마지막에 황금수, 안경자 두 분은 만세를 부르고 황금수 선생이 답사에서 “이 나라 분단을 통일하기 위해서, 자주적으로 통일하기 위해서, 우리 둘은 계속 죽을 때까지 싸울 거라”라는 결의한다.

 

 

통이 큰 여걸 안경자 여사 

 

황금수 선생은 고문 후유증과 3차 신경통 등으로 건강이 여의치 못해 자주·민주·통일운동 전면에 나설 수 없었다.

 

대신 안경자 여사가 본인의 귀중한 노동으로 번 돈과 부부가 생일이나 팔순, 미수 등 기념행사를 일절 하지 않고 아낀 돈을 사회 운동에 내놓는다.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결혼식에서 결의한 대로 자주·민주·통일운동 단체와 병마로 고통받는 동지들을 돈으로 후원한다.

 

그리고 두 분은 결혼은 하였지만, 지하운동의 습관이 몸에 배어 과거에 대해서는 일절 문서로 남기지 않는다는 ‘불문(不文)’, 말하지 않는다는 ‘불언(不言)’,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는 ‘불명(不名)’ 등 3대 원칙을 그대로 고수하다 보니 이력을 알 수 없다.

 

다행히 필자가 부군 황금수 선생과 이낙호 여사(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의 구술을 토대로 권오헌 선생(양심수 후원회), 박영수 여사(도강호 선생 부인), 이영자 여사(범민련 김규철 선생 부인), 이정숙 여사(4.9통일열사 이수병 선생 부인) 등의 보충 증언을 통해 부족하게나마 이력을 정리하였다.

 

안경자 선생은 평양 출신으로 고향을 오매불망 그리워하며 누구보다 통일을 소원하였다.

 

그래서 1950년 말부터 부산에서 의식 있는 여러 동지를 만나 본인의 노동으로 번 돈으로 경제적 도움을 주고, 본인도 직접 노동운동을 한다.

 

4.19혁명 이후는 본인의 노동운동보다는 자주·민주·통일운동을 하는 동지들을 후원하는 데 주력한다.

 

그때 동지들이 먼저 작고하였지만 민민청 이낙호 여사와 부군 김동식 선생, 민자통 김한덕·김재봉·도강호 선생 그리고 범민련 김규철 선생 등이 있었다.

 

보통 부산 운동은 2차 인혁당 사건으로 ‘암장’이라는 서클을 많이 알고 있지만, 부산은 당시 학생 운동 모임인 암장 말고도 청년 조직인 성민학회와 창신학회가 있었다.

 

성민학회는 진보당 이전부터 조직된 부산의 청년조직으로 김배영, 김재봉, 김한덕 등이 성원이었고, 이종석 등의 창신학회는 성민학회의 김배영을 통해 교류하고 있었다.

 

안경자 선생은 통이 큰 여걸이었다.

 

존경하는 안경자 선생님!

 

조국은 기억할 것입니다.

 

선생님의 이름과 자주·민주·통일을 위해 걸어온 길을!

 

안경자 선생이 걸어온 길

 

1930년

8월 14일 평양 출생. 평양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님. 해방 직후 서울로 내려와 미용사 자격을 취득. 강원도에서 미용사 생활을 하다가 한국전쟁이 나자 부산으로 이동함.

 

1957~1960년 

부산에서 미용사로 미장원과 미용학원 운영,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 미용노조 건설 주도적 참가, 부산 성민학회(김한덕, 김재봉 등) 성원과 교류, 부산 지역 김규철, 도강호, 이상배, 조평래 등과 교류·후원하며 본인도 노동운동에 참여.

 

1960년

4.19혁명 후 민민청 성원과 교류하며 자주·민주·통일운동에 매진.

 

1970년

상경하여 경락마사지 시술 창시.

 

1987년

(연도 정확하지 않음) 가톨릭 평화신문에 황금수 선생 3차 신경통 옥중 병마 투쟁 기사를 보고 출소하면 동지로 함께 해야겠다고 결심함.

 

1990년

11월 4일 황금수 선생과 산상 결혼, 결혼 후 부군과 함께 양심수후원회, 범민련 남측본부, 남민전 동지회, 진보연대, 추모연대, 사월혁명회 등 민족민주운동단체와 병마로 고통받는 동지들을 위해 스스로 노동하여 번 돈으로 후원.

 

2007~2017년 

이명박근혜 정권 10년을 거치며 한미FTA 투쟁, 광우병 촛불, 총체적 관건 부정선거 촛불, 박근혜 탄핵 촛불 등의 투쟁에 부군 황금수 선생과 거리에 나서 민중과 함께함.

 

2023년

9월 17일 숙환으로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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