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부부 사이에 의리를 지켜야”…‘이창기 10분사랑상’ 수상자 권오창

문경환 기자 | 기사입력 2023/10/16 [15:39]

“부부 사이에 의리를 지켜야”…‘이창기 10분사랑상’ 수상자 권오창

문경환 기자 | 입력 : 2023/10/16 [15:39]

▲ 2017년 11월 6일 트럼프 방한 반대 기자회견에서 발언하는 권오창 선생.     

 

올해 2월 25일 발표된 제5회 이창기상 수상자 명단에 많은 이들이 깜짝 놀랄 이름이 있었다. 

 

바로 ‘이창기 10분사랑상’을 수상한 권오창 진보당 고문과 부인 우춘성 여사다. 

 

진보와 통일의 길에서 애틋한 사랑을 나누며 모범적인 부부 생활 혹은 애인 관계를 보인 이들에게 수여하는 게 ‘이창기 10분사랑상’인데 구순의 노부부가 이 상을 받는다니 놀라울 수밖에. (권오창 고문은 올해 89세, 우춘성 여사는 91세다)

 

대체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인지 이 상을 추천한 김은희 서울주권연대 서남지회 운영위원장에게 들어보았다. 

 

기자: 보통 젊은 일꾼들 위주로 주던 상인데 갑자기 원로 선생님이 이 상을 받아 정말 놀랐다. 

 

김은희(아래 김): 서울주권연대 서남지회 집행부 회의 때 논의를 해서 추천했다. 작년에 사모님 몸이 많이 안 좋으셨는데 권오창 선생님이 지극히 간호하셨기 때문에 추천을 한 거다. 

 

기자: 건강이 어떻게 안 좋았나? 병원 진단이 있었나?

 

김: 처음에는 기력도 없고 식사도 잘 못하고 기억력도 떨어지고 해서 보건소를 먼저 갔다. 치매 검사를 했는데 굉장히 안 좋게 나왔다. 그래서 대학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했다. 병원에서는 단백질 부족 등 영양부족이 원인이라며 아직 치매 판정을 하지는 않았다. 치매 판정을 하면 치매약을 먹어야 하는데 이게 입맛을 떨어뜨려 영양부족이 더 심해질 수 있다고 한다. 아무튼 이 과정에서 권오창 선생님이 사모님 부축해서 왔다 갔다 하셨는데 고생을 많이 하셨다. 

 

기자: 건강이 갑자기 안 좋아진 건가?

 

김: 사실 몇 년 전부터 건강이 안 좋았다. 꼭 치매가 아니라도 기력이 없어 집안 살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권오창 선생님이 살림을 도맡아 하게 됐다. 

 

기자: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나?

 

김: 요양 등급이 나와서 작년 초부터인가 요양보호사가 하루 세 시간씩 왔다. 또 선생님이 민주유공자라서 보훈처에서 정기적으로 가정 방문을 와서 도와준다. 그런데 그 외의 시간은 오로지 선생님이 사모님을 돌봐야 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원래 선생님이 기자회견이나 집회 같은 데 빠지지 않고 참석했는데 한 몇 년 집 밖을 거의 나오지 못했다. 

 

기자: 24시간 돌봐드려야 할 정도였나?

 

김: 그렇다. 물론 코로나19 사태도 있었다. 바깥에 나갔다 와서 코로나바이러스라도 옮기면 위험하니까 최대한 자제한 측면도 있다. 그런데 그보다는 작년에 위험한 일이 있었다. 사모님이 혼자 있을 때 빨래를 삶아야 한다고 불을 쓰다가 다 태워버린 적이 있었다. 큰일 날 뻔했다. 가스레인지가 위험해서 잠가놔도 어떻게든 여는 방법을 찾아서 썼다. 또 혹시라도 혼자 있다가 집을 나왔는데 길을 못 찾으면 큰일 아닌가. 

 

기자: 권오창 선생님이 원래 살림을 안 해보셨을 텐데.

 

김: 맞다. 안 해본 일을 하려니 힘이 든다. 게다가 사모님이 입맛이 없어서 식사를 잘 안 하시니 만날 시장에서 입맛이 돌 만한 음식 재료를 사야 했다. 선생님이 연세도 많고 다리도 불편하고 해서 장 보는 것도 큰일이었다. 

 

기자: 선생님도 건강이 안 좋을 텐데.

 

김: 원래 다리가 불편한 것도 있고, 뇌졸중 약도 계속 먹고 있다. 최근에 치과 치료를 받았다. 염증이 너무 심해서 이를 모두 뽑는 큰 치료를 몇 달 걸쳐서 했다. 이 과정에서 갑자기 어지럼증이 생겨 응급실을 갔는데 그동안에 사모님 돌볼 사람이 없어서 나에게 연락하는 일도 있었다. 

 

▲ 2014년 2월 15일 「파인 권오창 역사를 말하다」 출간기념회에서 인사말을 하는 권오창 선생. 

 

기자: 보통 이런 상황이 되면 요양병원을 알아보지 않나?

 

김: 사실 사모님 간호하다가 선생님까지 건강이 나빠질 것 같아서 우리가 요양병원을 알아봤다. 사회복지사에게 연락해서 물어보기도 하고 선생님께 권하기도 했다. 선생님이 예전에 투쟁하다가 알게 된 의사가 있는데 이분도 요양병원을 안 좋게 생각하지 마시라고 설득했다. 

 

기자: 수락하셨나?

 

김: 선생님이 사모님을 요양병원에 보낼 생각이 아예 없었다. 의리를 저버린다고 생각하신다. 

 

기자: 의리?

 

김: 권오창 선생님은 자신이 공부할 때, 감옥에 갔을 때 사모님이 뒷바라지했고 그렇게 평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이제 자신이 사모님을 돌보고 살려내는 게 의리를 다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자기가 살릴 수 있다는 의지가 강하다. 빨치산 투쟁 정신으로 살려내겠다고 하신다. 

 

기자: 그런 마음을 먹기가 쉬운 일이 아닌데.

 

김: 한 가지 더 있다. 선생님이 5.18 유공자라서 돌아가시면 광주 망월동 묘역에 묻히신다. 그런데 사모님이 먼저 돌아가시면 사모님은 유공자가 아니니 거기에 묻힐 수가 없다.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우리 부부는 죽을 때도 함께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 2012년 추석을 맞아 후배 운동가들이 권오창 선생과 우춘성 여사 집을 방문했다.  © 유승재

 

기자: 정말 부부의 정, 의리가 이렇게 끈끈한 건 처음 본다. 그런데 두 분이 어떻게 만나셨는지도 궁금하다. 사모님이 연상이라고 들었다. 

 

김: 사모님이 두 살 더 많다. 그런데 오히려 그 시대에는 여성이 연상인 경우가 그렇게 희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모님은 부잣집 외동딸이었다. 대청마루가 있고 방이 여러 칸이었고 일꾼도 딸린 집이었다고 한다. 반면 선생님은 완전히 가난한 집이었다. 그런데 권씨 집안이 양반 집안이라고 해서 시집을 보냈다고 한다. 혼사가 오갈 때 여자 쪽 집안에서 큰아버지가 먼저 보러 왔는데 가난하지만 총각이 좋으니까 결혼이 성사됐다고 한다. 

 

기자: 그때가 일제강점기였나?

 

김: 아니 막 해방됐을 때다. 그때 선생님은 고등학생이어서 결혼하고도 공부를 계속하고자 했다. 장인어른한테 공부시켜달라고 해서 처가살이를 하면서 일꾼 노릇도 했다고 한다. 

 

기자: 데릴사위 같은?

 

김: 그렇다. 그렇게 해서 동국대에 가고 대학원도 갔는데 그 비용을 거의 장인어른이 댔다고 한다. 처가가 문경인데 사모님은 거기서 국밥 만들어서 매일같이 선생님께 가져다드리고 했다. 또 처가살이를 안 하던 때도 있었는데 부잣집 외동딸로 자라서 집안일은 일꾼들이 다 했는데 갑자기 가난한 집 와서 손수 일을 하느라 엄청나게 고생했다고 한다. 

 

기자: 그런데 선생님이 대학 나오고도 돈을 번 건 아니라서 더 힘들었겠다. 

 

김: 정말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하더라. 나중에 사모님도 서울로 올라와서 같이 살았는데 선생님 누님이 고물상을 해서 그 옆에 방을 얻어서 고물상 일을 도와준 적도 있다고 한다. 선생님이 사회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갔는데 교도소가 목포에 있어서 옥바라지도 배로 힘들었다. 

 

기자: 부잣집 외동딸이 겪기에는 정말 영화 같은 얘기다. 나도 듣기로 세 남매 먹일 라면이 부족해 퉁퉁 불려서 먹였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남편이 하는 사회 운동에 공감은 하셨나?

 

김: 어릴 때 동네에서 공부 잘하고 똑똑한 청년은 다 죽었다고 얘기하시더라. 그때 사람들 학살했던 자들이 지금 여당(국힘당)이 됐다, 절대 저런 자들은 권력을 잡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남편이 사회 운동하는 걸 원망하는 소리는 들어본 적 없다. 예전부터 우리 사무실에 여러 가지 반찬 만들어서 자주 보내주셨다. 우리 활동에 공감한다는 뜻 아닐지 싶다. 

 

▲ 2018년 9월 15일 노래패 ‘우리나라’ 공연장을 함께 방문한 권오창 선생과 우춘성 여사.  © 서지연

 

기자: 뒤에서 묵묵히 지지하고 지원하셨나 보다. 

 

김: 꼭 그런 건 아니다. 2000년대 중반인가에 철거민 투쟁이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가 그때 철거민 투쟁으로 쟁취한 임대아파트다. 그때 용역들이 와서 행패 부리는 걸 막기 위해 철거민들이 똥탄을 던져가며 힘들게 싸웠다. 그런데 그때 선생님이 대책위원장을 하셨고 사모님도 앞장서서 싸웠다. 그래서 지금도 여기 주민들이 선생님이랑 사모님께 고마워하고 명절 때 선물도 드리고 한다. 그걸 보면 사모님도 싸울 때는 굉장하다. 

 

기자: 권오창 선생님이 원래 모든 투쟁에 빠짐없이 참석하실 정도로 실천력이 높았는데 지금 상황이 아주 답답할 것 같다. 

 

김: 맞다. 요양사가 오면 몇 시간 정도 밖에 나올 수는 있는데 그래봐야 멀리 오래 나가 있을 수 없으니 어쩌다 가끔 행사에 나오시는 정도다. 많이 답답해하신다. 그래서 한때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고 후회도 하고 포기할지 생각도 하고 그랬지만 후배 일꾼들이 집에 찾아가면 또 힘을 내신다. 

 

▲ 2019년 9월 2일 한미연합사 잔류 무효 주민소송 소송인단의 기자회견에서 소송인단 대표로 참석한 권오창 선생이 상징의식을 하고 있다.  © 박한균

 

기자: 바깥 상황을 잘 모르시지는 않나?

 

김: 아니다. 인터넷 방송과 기사를 찾아보면서 윤석열 퇴진 촛불집회 하는 것도 다 보시고 있다. 그러면서 방송에 아는 후배 얼굴이 나오면 반가워하신다. 

 

기자: 그래도 직접 현장에 있는 것만은 못할 것 같다. 

 

김: 그래서 올해부터 우리가 의지를 모아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일꾼들이 집에서 사모님 돌봐드리고 선생님이 투쟁 현장에 나올 수 있도록 보장해 드리고 있다. 

 

기자: 그런데 촛불집회 나가면 행진도 해야 하는데 힘들지는 않으실까?

 

김: 오래 걷는 게 힘들다. 그래서 절뚝거리면서 걸으면 주변에서 불안하니 행진하지 말고 쉬라고 권유한다. 그런데 선생님은 자존심이 상해서 기어이 걸어간다고 하시더라. 선생님은 자신이 왕년에 육상 선수였다면서 놈들에게 꺾일 수는 없다고 하신다. 

 

기자: 굉장한 의지다. 

 

김: 선생님은 ‘전사는 싸우는 현장에서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신다. 현장에서 투쟁하면서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해야 한다, 그게 가장 행복한 것이다, 힘이 있는 한 끝까지 투쟁하겠다, 이런 생각을 하시는 것 같다. 

 

기자가 권오창 선생님 집을 방문하자 선생님은 “상황이 여의치 못해 직접 아내를 돌볼 수밖에 없다. 2년 넘게 투쟁에 나가지 못해 사죄하는 마음으로 산다”라고 하면서 후배들이 자주, 민주, 통일 운동을 잘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 2019년 1월 26일 국민주권연대 해오름제에서 2018년 남북정상회담을 돌아보며 기쁨의 춤을 추는 권오창 선생.  © 유승우

 

■ 권오창 고문 약력

 

1934년 2월 경북 문경 출생

1956년 동국대학교 법학과 입학

1957년 공무집행 방해 옥고

1965년 동국대학교 법학과 졸업

1966년 한일회담 반대 투쟁 학내 시위 주도 구속

1968년 동국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졸업

1969년 통일혁명당 민족주의 연구회 사건 옥고

1973년 대중당 총무국장

1979년 통일사회당 정책실장

1980년 광주항쟁 관련 옥고

1983년 정치범 동지회 운영위원장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 노동위원

1987년 6월 항쟁 유인물 사건으로 수배

1988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공동의장

1989년 정치학교 교양강좌 사건으로 옥고

1994년 사회주의연구회 사건으로 옥고

1995년 민중당 중앙위원

1997년 민중의 기본권 보장과 양심수 석방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민권공대위) 공동의장

2000년 반미반전비상대책위 위원장

2000년 미군 학살만행 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전민특위) 남측 대표로 국제전범재판소 참석(뉴욕)

2002년 주한미군철수운동본부 상임고문(현)

2003년 반미반전, 북미불가침조약 체결 촉구운동본부 공동본부장

2003년 8.15 민족공동행사 참석(평양)

2004년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상임대표

2011년 우리사회연구소 이사장

2017년 국민주권연대 고문

2020년 진보당 고문

 

 

 
권오창 관련기사목록
광고
광고
광고
광고
모범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