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미 테리는 무슨 일을 하였나
지난 16일(현지 시각) 미 연방검찰이 수미 테리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을 기소했습니다. 테리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미 중앙정보국(CIA)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한반도 문제 전문가입니다. 검찰은 테리가 한국 정부로부터 금품과 향응을 받으며 한국 정부의 대리인이 되어 불법 활동을 했다고 공소장에 밝혔습니다. ‘외국 대리인 등록법’에 따라 외국 정부를 위해 일할 때는 로비스트로 공식 등록하고 투명하게 활동해야 하는데 이를 어겼다는 것입니다.
테리는 지난 10년간 한반도 문제와 한국의 정책에 관해 국내외 언론과 유력 잡지에 기고해 왔으며 강연도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이런 테리의 주장들을 한국의 국정원과 외교부가 요구한 내용을 따른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반대로 미국도 한국 정부 정책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 정치인, 공무원, 언론인, 지식인 등을 물밑에서 만나는 일이 흔합니다.
2010년대 초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위키리크스에는 이런 사례가 많이 나옵니다. 일례로 한미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진 2006년 당시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의 행보를 봅시다. 김현종은 2006년 7월 24일 청와대 관계자 회의 후 버시바우 주한미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한국 정부의 약제비 적정화 방안 발표에 대해서 미국 정부에 미리 알리고,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전에 미국이 의미 있는 코멘트를 할 시간을 주며, 자유무역협정 의약품 작업반에서 협상할 수 있도록 한다는 등의 내용이 관철되도록 죽도록 싸웠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정부의 협상 대표가 미국에 협상 전략을 미리 알려주고, 대응할 시간을 벌어준 다음 미국에 유리하게 협상하기 위해 ‘죽도록 싸웠다’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위키리크스에는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을 ‘미국 대사관의 오래된 정보원’, 김승호 청와대 비서관을 ‘미국의 가치 있는 정보원’이자 ‘절대 보호 요망’ 정보원, 엄종식 통일부 차관을 ‘미국의 통일부 정보원’이라고 표현한 내용이 나옵니다. 또 반기문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노무현 대통령을 따돌린 정보원, 박선원 청와대 비서관은 남북정상회담 관련 보안 정보를 미국에 유출한 정보원이었습니다. 물론 위키리크스가 이런 정보원들을 폭로했지만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또 25일 자 조선일보 기사 「서울엔 수미 테리 뺨치는 ‘외국 앞잡이’가 수백명 있다?」에는 “전직 방첩 기관 관계자에 따르면, 외국 정부의 국익을 위해 한국 정부 관계자나 정치인들을 만나 선물을 주고 정보를 주입하는 ‘전문가’ 탈을 쓴 사실상의 외국 로비스트들이 서울에만 수백 명이 있다”라고 나옵니다.
아무튼 미국 검찰에 따르면 한국의 정보원들이 테리와 만나 식사를 하고 쇼핑하는 모습이 CCTV에 고스란히 잡혔습니다. 면세점에서는 신분을 공개하고 영수증을 챙기기도 했습니다. 무능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관행적으로 하는 일이라서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해당 요원도 비공개 활동을 하는 블랙 요원이 아니라 신분이 공개된 화이트 요원이라고 합니다.
특이한 건 문재인 정부 때는 테리가 청탁 기고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공소장에는 문재인 정부 시기에도 명품 선물을 여러 차례 받았다고 나와 청탁 자체는 있었던 듯합니다. 그렇다면 청탁을 받았지만 내용이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아서 기고를 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테리는 기본적으로 대북 강경 정책을 지향하고 화해 협력 정책을 반대함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테리는 2014년 북한 정권 붕괴가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2017년에는 개성공단 재개를 반대했으며 통일 이후에도 미국이 한국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문재인 정부 시기에는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을 반대했고 대북 협상도 반대했습니다. 또 한·미·일 협력, 한일 협력 강화를 주장해 문재인 정부 정책을 반대했습니다.
공소장을 분석하면 박근혜 정부가 9회, 문재인 정부가 11회, 윤석열 정부가 약 23회 등장합니다. 윤석열 정부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앞의 두 정부는 주로 연락을 주고받고 선물과 식사를 제공하는 내용이 대부분인데 윤석열 정부는 다양한 요구를 하면서 돈을 지급한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윤석열 정부가 테리에게 뭔가 많은 요구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다시 말해 윤석열 정부가 미국을 향해 할 얘기가 많았다는 뜻이 됩니다.
공소장에 적시된 기고 사례 가운데 눈에 띄는 글이 있습니다. 지난해 1월 19일 미국의 유력 외교 전문지 ‘포린 어페어스’에 기고한 「새로운 북한의 위협(The New North Korean Threat)」입니다. 국정원 요원이 저녁 식사를 대접하며 ‘확장억제 강화’의 필요성을 설명했고 그에 따라 쓴 글입니다. 테리는 이 글에서 “2022년 가장 간과된 지정학적 발전 중 하나는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이라면서 북한의 미사일 능력이 급격히 향상됐지만 “바이든 행정부는 이(북핵 폐기-필자 주)를 달성할 방법에 대한 새로운 정책을 내놓지 못했다”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모든 상황은 미국과 동맹국이 북한 정권에 대한 억제력을 강화해야 할 시급한 필요성을 분명히 보여준다”라고 하였습니다.
22일 방송한 ‘김어준의 겸손은힘들다 뉴스공장’에 출연한 김준형 조국혁신당 의원은 테리가 윤석열 정부의 요구에 맞춰 핵협의그룹을 만드는 데 기여했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당시 윤석열 정부는 ‘사실상 핵공유’, ‘사실상 핵배치’ 같은 말을 계속했고 미국은 아니라고 부인하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아마 미국은 대체 윤석열 정부가 왜 자꾸 저런 억지를 부리나, 독자 핵무장하려고 준비하는 건 아닌지 의심하며 조사했고 거기에 테리가 연루되어 있음을 포착하고 이번에 본보기로 날린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미국이 테리를 때린 것은 윤석열 정부를 때린 것이나 마찬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추해 보자면 지금 미국 정부는 윤석열 정부를 향해 ‘대북 강경책 좀 그만 요구해라’는 경고를 보낸 것 아닐까요?
미국의 처지
지금 미국 대선 유력 주자인 트럼프 후보는 선거 유세 과정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가 북한과 친하다고 자랑합니다. 트럼프는 지난 13일 총에 맞아 죽을 뻔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직후인 18일 위스콘신주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후보 수락 연설을 하면서도 “나는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아주 잘 어울렸다. (집권하면) 나는 또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잘 지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핵무기를 많이 가진 사람과 잘 지내면 좋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자꾸 하는 걸까요? 이게 대선에서 표를 얻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미국인들이 이런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바꿔 말하면 미국인들이 북한에서 핵미사일이 날아올까 두려워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트럼프는 자기가 집권하면 그럴 걱정 안 해도 된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럼 바이든 대통령은 왜 이런 얘기를 하지 않을까요? 임기 동안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막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막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더 심해졌습니다. 아마 바이든도 트럼프처럼 북한과 대화를 해서 핵미사일 위협을 멈추고 싶었을 것입니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22년 5월 20일 바이든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주한미대사관이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연락해 “바이든 대통령이 문 전 대통령을 개인적, 비공식으로 만나고 싶다”라며 일정 조율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방한 직전인 19일 최종 무산을 통보했습니다.
대통령이 다른 나라를 방문해 그 나라의 전직 대통령을 만나는 것은 현직 대통령에 대한 굉장한 결례입니다. 그래서 당시에도 여러 논란이 있었습니다. 윤석열이 미국에 강력히 항의해서 결국 무산되었다는 이야기도 돌았습니다.
바이든이 외교 결례를 무릅쓰고 문재인 전 대통령을 만나려 한 것은 북한과의 통로를 잇기 위해서였습니다. 윤석열 정부가 대북 돌격대를 자처하고 미국도 그런 용도로 활용할 구상이었기에 윤 대통령을 대북 대화 통로로 쓸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북정상회담의 경험이 있는 문재인 전 대통령을 대북 특사로 보낼 구상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트럼프도 북미정상회담을 하기 전에 남북정상회담을 먼저 하도록 했습니다. 북한과 제대로 된 소통 창구가 없으니 문재인 전 대통령을 자신의 특사 역할로 활용한 셈입니다. 그렇게 문재인 전 대통령이 다리를 놓아 북미정상회담이 성사되었습니다. 바이든도 이걸 떠올렸을 것입니다.
바이든 정부는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는 등 군사행동을 할 때마다 ‘조만추(조건 없는 만남 추구)’를 외치며 묻지 마 대화를 북한에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이 이를 냉정하게 거절했습니다. 미국이 말만 하고 실제 대화를 위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 외에 윤석열 정권이 대북 강경책으로 일관하면서 북미 대화 분위기를 번번이 깨버린 것도 이유입니다.
올해 3월 4일 미라 랩-후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대양주 담당 선임보좌관이 북한 비핵화와 관련해 “중간 조치를 고려할 것”이라고 처음 밝혔습니다. 정 박 미 국무부 대북정책담당 부차관보도 ‘중간 조치’는 당연하다며, 워싱턴 기류에 변화가 있음을 시사했습니다. 그러자 4월 27일 장호진 대통령 국가안보실장이 방송에 출연해 “미국의 상당한 고위층을 포함해서 여러 차례 ‘중간 단계’라는 것은 없다고 확인했다”라고 하였습니다. 북한과 타협하려는 미국의 발목을 잡은 것입니다.
답답해진 미국이 일본을 통해 북한과 접촉을 해보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래서 기시다 총리가 북일정상회담을 언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김영호 통일부장관은 “북한이 서울을 거치지 않고 워싱턴과 도쿄로 절대 갈 수 없다”라며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테리를 통해 확장억제 강화를 요구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미국 처지에서 이미 한국에 핵우산을 제공하겠다고 했는데 윤석열 정부가 그걸로 만족하지 않고 뭔가 더 해달라고 매달리고 그 과정에 독자 핵개발까지 운운하니 답답할 노릇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략핵무기를 수시로 한반도에 보내주고 핵협의그룹을 만들어주는 등의 합의를 해줬습니다. 군사적으로는 효용성이 매우 떨어지는 합의들이지만 북한을 자극하기 충분한 내용입니다. 결국 윤석열을 달래느라 미국은 북한과의 대화가 더 어려워졌습니다.
이런 과정을 돌아보면 윤석열이 마치 물귀신처럼 바이든을 물고 늘어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바이든은 대선에서 미국 유권자에게 별다른 내세울 성과가 없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에서 성과를 내지 못했는데 북한 문제에서도 성과가 없으니 미칠 노릇입니다. 그런데 트럼프는 그런 바이든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지 계속 이 문제를 거론합니다. 그러니 바이든은 더 열 받을 것입니다.
이제 바이든 임기는 반년 정도 남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어쩔 수 없이 재선을 포기했습니다. 정말 답답하고 미칠 노릇일 겁니다. 그래서 윤석열에게 무언가 화풀이 겸 경고를 하려는 차원에서 테리를 기소한 것 아닐까요?
정 박 부차관보도 5일 사임했습니다. 미 국무부는 사임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현 정부 임기가 반년 정도 남았고 사실상 대선이 진행되는 11월이면 실질적으로 임기가 끝나는 것이나 마찬가진데 굳이 지금 사임하는 것도 이상합니다. 아마 대북 정책 담당인데 성과를 못 냈다고 질타를 받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테리 기소와 연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노컷뉴스는 2021년 1월 2일 자 「한국계 전문가가 더 강경..바이든 대북정책의 숨은 변수」에서 “바이든 행정부 인수위 기관검토팀에 낙점된 정 박(박정현) 브루킹스 연구소 한국석좌와 수미 테리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연구원, 수 김 랜드연구소 연구원 등”을 대표적인 대북 강경파 전문가로 꼽으면서 바이든 정부 내 ‘단계적 해법’ 세력과 대립한다고 소개했습니다. 이걸 보면 정 박이 이제 와서 ‘중간 조치’를 주장하긴 했어도 기본적으로는 대북 강경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트럼프 얘기를 좀 더 해봅시다. 트럼프는 “핵무기를 많이 가진 사람과 잘 지내면 좋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트럼프는 ‘북한이 핵을 많이 가졌으니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윤석열은 얼토당토않게도 ‘북한이 핵을 가졌으니 힘으로 눌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자기는 핵이 없으니 미국 보고 핵 좀 빌려달라고 떼를 씁니다. 능력도 없으면서 싸우자고 시비를 거는 모양새입니다.
트럼프가 자꾸 대선에 북한을 끌어들이자 23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사가 이에 관한 내용을 담은 논평을 발표했습니다. 논평은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있을 때 수뇌(정상)들 사이의 개인적 친분 관계를 내세우면서 국가 간 관계들에도 반영하려고 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질적인 긍정적 변화는 가져오지 못하였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라고 국가의 대외 정책과 개인적 감정은 엄연히 갈라보아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트럼프가 이 논평을 보고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요? 아마 뛸 듯이 기뻤을 것입니다. 애인에게 사랑한다는 편지를 계속 보냈는데 답장이 없다가 드디어 기다리던 답장을 받은 기분일 것입니다. 내용도 나쁘지 않습니다. 실질적 성과는 없었지만 노력한 것은 인정한다는 말이니까요. 그리고 공사를 구분하라고 한 충고도 어찌 보면 사적인 관계는 인정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건 북한이 암묵적으로 트럼프를 지지해 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회고록 『변방에서 중심으로』를 보면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합의 없이 끝난 것을 두고 “트럼프 본인도 나중에 내게 후회한다는 말을 하며 미안해했다”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트럼프가 개인적으로, 사적으로는 북한과 관계를 진전시키고 싶었다고 얘기한 것입니다.
북한의 핵미사일이 날아오지 못하도록 대화에 목을 매는 미국, 눈치 없이 일전불사를 외치며 분위기를 깨는 윤석열. 윤석열 정부는 지금 한미관계가 역대 최상이라고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윤석열이 과연 미국의 경고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지 의문입니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미관계 관련기사목록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