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한국전쟁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기본 관점은 “한반도를 극동 침략을 위한 군사기지”로 책정하고 나아가 한반도를 잉여상품 판매시장, 자본 투하지, 원료 공급지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도와 부딪치는 그 어떠한 사안도 미국에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의도를 실현해야 할 이승만 정권이 거의 유지될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독재와 민생 파탄에 맞서 거센 항쟁을 일으킨 국민에 의해 이승만 정권은 1949년도에 이르러 거의 붕괴 직전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붕괴를 모면하였다.
미국은 징병제를 실시해 군 병력을 5만에서 11만으로 늘리고 무기를 반입하는 등 이전부터 전쟁 준비를 해왔다.
또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와 미 대사 무초(John Joseph Muccio, 1900~1989)는 관련 계획을 작성하였다.
1950년 1월 12일 미국은 애치슨 라인을 선포하여 한반도와 대만을 방위선에서 제외한다고 발표하였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미국이 한국전쟁의 책임을 피하려고 기만선전을 한 것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한국전쟁 전문가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1943~)는 전쟁이 발발하기 전 이미 한반도는 내전 상태에 있었고 미국이 이에 참여함으로써 전쟁이 더욱 확전되었을 따름이라고 평가하였다.
실제로 1949년 한 해에 38선에서 무려 2,600여 회의 무력 충돌이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은 국민들 몰래 대전으로 천도하고 거기서 소위 대전협정(이승만과 맥아더가 체결)을 맺어 종잇조각 한 장으로 미국에 미군 재판관할권을 넘겨주었으며, 별도의 개인 서신을 보내 한국군의 지휘권을 맥아더에 이양하는 등 국가 주권을 팔아먹고 말았다.
이후 미국은 자신의 의도를 은폐하기 위하여 교묘하게 유엔군이란 간판 아래 전쟁을 주도하였다.
이것이 나중에 말썽이 나니까 1978년에 와서 한미연합사령부를 새로 꾸렸다.
한국전쟁에서 미군은 우리 민족에 대하여 잔인한 학살을 감행하였다.
보도연맹 30여만 명을 각지에서 학살함은 물론 세균전을 감행하였고, 네이팜탄 등으로 초토화전을 전개하였다.
황해도 신천에서는 미8군 사령관 워커(Walton Harris Walker, 1889~1950)의 지휘 아래 해리슨(Harrison D. Maddon, 미군 방첩부대·CIC 소장으로 추정)이 직접 주도하여 군민의 4분의 1인 3만 5,000여 명을 학살하였다고 한다.
이때 1,550여 명이 방공호 속에서 떼죽음을 당하고 궁흥면 만궁리에서는 어린이, 노인, 부녀자 할 것 없이 1,600여 명이 떼죽음을 당하였다.
전쟁 결과 모든 국토는 초토화되었으며 약 520만 명의 우리 민족이 죽거나 다치거나 행방불명됐다.
그중에서 약 360만 명이 민간인이다.
미군은 장진호 전투에서 포위 작전에 걸려 참패하고 흥남 부두를 통해 후퇴하고 말았다.
미국이 먼저 휴전 제의를 함으로써 전쟁은 중단되었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미군이 신생국 북한을 무너뜨리지 못하면서 미국 내에서조차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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