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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청년 이야기] ①‘주먹 자랑’하던 불량 청년이 개과천선한 사연

강서윤 기자 | 기사입력 2022/10/12 [13:18]

[북한 청년 이야기] ①‘주먹 자랑’하던 불량 청년이 개과천선한 사연

강서윤 기자 | 입력 : 2022/10/12 [13:18]

지난 9월 29일 북한 노동신문은 기사 「당의 품에서 우리 청년들은 이렇게 자라고 있다」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집단 속에서 새 삶을 살게 된 청년 9명’의 이야기를 실었다. 

 

  

  

이 소식은 국내 언론에서도 지난 9월 30일 「“평생 주먹 자랑만 했었소”…김정은 격려로 환골탈태한 ‘범법자’ 청년들」이라는 제목으로 내용 일부를 전한 바 있다. 하지만 이 기사는 각 청년과 관련한 이야기를 자세히 전하지 않아 궁금함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에는 또 어떤 사연이 숨어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지난해 평양에서 열린 청년절 경축행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살펴봐야 한다. 

 

2021년 8월 말 평양에서 청년절 30주년을 맞아 경축행사가 열렸다. 곳곳에서 모인 청년들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단체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이후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사정이 어려운 ‘험지’를 가겠다고 나선 청년 9명을 노동당 중앙위원회 본부 청사로 특별히 따로 불렀다. 또 청년 9명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북한에서는 최고지도자와 함께 찍은 사진이 대대손손 가보로 전해질 만큼 중요하게 여겨진다.

 

언뜻 청년 9명이 뭔가 ‘엄청난 성과’를 냈으리라고 생각할 법하다. 하지만 그렇기는커녕 한때 이 청년들은 온갖 사고와 소동을 일으켜 따가운 눈총을 받던 ‘불량 청년들’이었다. 오죽하면 가족·친지들도 두손 두발 다 들고 이 청년들을 거의 포기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랬던 청년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험지로 가겠다고 스스로 ‘탄원진출’해 나선 것이다. 

 

탄원진출이란 사정이 어려운 지역에 가겠다고 지원, 그곳에서 노동자·농민으로 생활하는 것을 뜻한다. 청년들로서는 어린 시절부터 살아온 정든 고향을 떠나 머나먼 지역에서 뼈를 묻을 수도 있다는 쉽지 않은 결심을 한 셈이다. 

 

이런 사연을 보고받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청년들을 직접 맞아 격려하고 힘을 북돋아 줬다는 점이 주목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해당 당 조직들에서는 어렵고 힘든 부문에 탄원진출한 청년들이 힘들어할 때에는 지팡이가 되어주고 발걸음이 더뎌질 때에는 기꺼이 떠밀어주고 손잡아 이끌어주어야 합니다”라며 “그렇게 하여 오늘과 같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탄생한 우리 시대의 자랑인 이런 청년들이 먼 훗날에 가서 자기의 한 생을 총화(평가)할 때 인생의 졸업증을 받을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아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함께 사진을 찍은 청년 9명의 이름과 현재 소속 단위다. 

 

전천탄광 리수복청년돌격대 김광석, 개천지구탄광연합기업소 조양탄광 최충성, 무산광산련합기업소 노천분광산 오충현, 개천철도국 개천철길대 청년기계화기동1중대 허강일, 흑령탄광 차광수청년돌격대 리주혁, 라진상하수도사업소 무창농축산물생산분사업소 김광명, 강원도청년돌격대 김철룡, 임업관리국 대관임산사업소 최재천, 룡등탄광 김광철청년돌격대 리정혁. 

 

2022년 10월 기준, 청년 9명이 각 험지에 자리하고 난 뒤로 1년이 넘게 지났다. 1년여 동안 청년들은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이번 연재에서는 노동신문을 바탕으로 사연을 추려 순서대로 소개한다.

 

①‘주먹 자랑’하던 불량 청년이 개과천선한 사연

 

첫 번째 순서는 김광석 전천탄광 리수복청년돌격대 분대장 겸 초급단체위원장의 이야기다. 

 

 

 

 

산세가 험준한 자강도 중남부 전천군, 이곳에 김광석 분대장의 일터인 전천탄광이 있다. 전천탄광에서 생산되는 석탄은 전천군을 넘어 자강도 곳곳에 공급된다. 이런 점에서 전천탄광은 자강도의 주요 석탄생산기지로 꼽힌다. 1954년 7월 김일성 주석이 이곳을 현지지도하면서 탄광을 빨리 확장할 것을 ‘교시’하기도 했다. 바로 이런 곳으로 김광석 분대장이 자원해 간 것이다.  

 

 

  

지금은 본인이 맡은 탄광에서 청년 분대원들을 이끄는 어엿한 분대장, 초급단체위원장이 됐지만 김광석 분대장도 처음에는 분대원이었다. 김광석 분대장은 전천탄광에 와서 ‘탄밭(석탄이 나는 밭이라는 뜻)’을 찾기 위해 갱을 새롭게 파는 공사에 앞장서며 비지땀을 쏟았다.

 

처음 해보는 고된 노동에 잠도 부족했고 그리운 고향 집도 눈가에 어른어른했다. 하지만 가장 마음이 쓰인 것은 자신과 함께하는 분대원들이었다. 

 

집을 떠나 가족들과 외따로 멀어져 전천탄광에서 ‘고생’을 한다는 점에서는 김광석 분대장이나 다른 청년들이나 처지는 같았다. 그런데 전천탄광에 모인 청년들을 한마음으로 묶어 세우기가 쉽지 않았다고 김광석 분대장은 말한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김광석 분대장과 분대원들이 두런두런 둘러앉았다. 갱도 내 석탄 운반용 차를 옮기기 위한 레일을 깔며 밤샘 작업을 하느라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녹초가 된 상황. 격식 없는 이야기가 저마다 오가는 자리에서 김광석 분대장은 자신이 전천탄광으로 오게 된 속 이야기를 분대원들 앞에 털어놨다. 

 

“언젠가 동무들이 어떻게 되어 탄원하게 되었는가 하고 나에게 물은 적이 있었지. 사실 난 20살이 훨씬 넘도록 주먹 자랑만 하면서 살아왔소. 우리 부모는 언제 한번 머리를 들고 살지 못했지.”

 

분대원들 앞에서 꺼낸 솔직한 ‘고백’에 이어 김광석 분대장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게 된 사연을 설명했다.

 

“어느 날 군대에 나갔던 동창생들이 고향에 왔는데 당원도 되고 영광의 기념사진도 찍고 얼마나 부럽던지. 그들이 나에게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고 물었을 때 난 정말 부끄러웠소. 그래서 탄원을 결심했는데 나에겐 찾아갈 조직이 없더구먼. 이런 나를 청년동맹 조직에서 차별 없이 품어 탄원생들의 대오에 세워주었지. 그것만도 나에겐 영광인데 글쎄 경애하는 총비서 동지의 품에 안겨 기념사진까지 찍을 줄 어찌 알았겠소.”

 

이후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었노라고 김광석 분대장은 말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김광석 분대장은 “처음으로 집 대문을 떳떳이 열고” 들어섰다. 그러자 아버지가 자신을 부둥키고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기다렸다. 처음으로 네가 보고팠구나.”

 

김광석 분대장은 “원수님께 다진 맹세를 지키기 전에는 고향 집 문턱을 넘어서지 말라, 이것은 우리들 모두의 당부”라며 “탄원자의 영예를 안고 영광의 기념사진을 찍은 우리에겐 쓰러질 권리가 없소. 동무들, 남들이 한 걸음 걸을 때 우린 열 걸음, 백 걸음 뜁시다”라고 말했다.

 

갱도 일을 마친 어느 날, 김광석 분대장은 분대원들의 빨래를 널고 개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자신의 발을 만지는 따스한 감촉이 느껴졌다. 잠에서 깬 김광석 분대장의 눈에 들어온 건 자신의 헤진 신발을 벗기고 새 신발을 신겨주는 초급당비서의 얼굴이었다. 초급당비서는 눈을 뜬 김광석 분대장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보다 발이 커서 신발 때문에 애를 먹었겠는데 내 미처 관심을 돌리지 못했소. 특별히 주문해서 만들었는데 맞겠는지 모르겠구먼.”

 

직접 김광석 분대장의 발에 새 신발을 신겨주며 발에 잘 맞는지 어떤지 꾹꾹 눌러보고 일일이 살핀 초급당비서의 애정 어린 손길. 이런 초급당비서의 모습이 마치 ‘첫걸음마 떼는 아기에게 고르고 골라 신발을 신겨주는 어머니’ 같았다고 노동신문은 전한다. 

 

그런 초급당비서 앞에서 김광석 분대장은 겉으로는 ‘작업 신발인데 작지만 않으면 그만’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꼭 맞는 신발을 신고 속으로는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한다. 

 

“인생의 먼 길을 가자면 신발부터 바로 신어야 하오.” 

 

이는 김광석 분대장이 일터에 나설 때마다 늘 되새겨본다는 초급당비서의 말이다.

 

노동신문은 “9명 청년들의 1년은 길지 않지만 그 성장의 하루하루에 바쳐온 헌신과 진정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없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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