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3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일본 정기국회(통상국회)에서 시정방침 연설을 했다. 우리로 치면 한 해 동안 정권의 국정 방향을 밝힌 신년사를 한 것인데, 이 자리에서 기시다 총리는 한일관계에 관한 언급도 했다.
“국제사회에서 여러 과제를 대응하기 위해 협력해야만 하는 중요한 이웃 나라인 한국과는 국교정상화 이래로 우호 협력관계에 바탕해 일한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되돌리고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긴밀히 의사소통해 가겠다.” -지난 1월 23일 기시다 총리가 한 시정방침 연설 중에서.
위 문장에서 살펴볼 열쇳말은 “중요한 이웃 나라”, “일한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되돌리고”, “긴밀히 의사소통”이다. 이전과는 상당히 바뀐 표현이다.
앞서 기시다 총리는 문재인 정권 시기였던 2022년 시정연설에서는 한국을 단지 “중요한 이웃”이라고만 표현했다.
그 이전 시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이 한국을 겨눠 반도체 핵심 소재 수출을 제재한 2019년 당시, 아베 총리가 시정방침 연설에서 한국을 언급조차 하지 않고 무시했다.
이전과 비교해보면 한국을 향한 일본의 평가가 상당히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기시다 총리가 위처럼 말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세 가지 측면에서 짚어보자.
첫째: 협력해야만 하는 중요한 이웃나라
“국제사회에서 여러 과제를 대응하기 위해 협력해야만 하는 중요한 이웃나라.” -기시다 총리가 시정연설에서 한국을 표현한 말.
위 기시다 총리의 시정연설이 나온 같은 날,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은 연례 연설에서 “다케시마(독도)는 역사적 사실에 비춰봐도, 국제법상으로도 일본 고유의 영토다”라며 “(한국에) 의연하게 대응한다”라고 밝혔다.
이뿐만 아니라 하야시 외무상은 지난해 무산된 조선인 노동자가 강제동원된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다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일본은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 강제동원의 역사를 부정하고, 메이지유신(1868년) 이전까지의 사도광산 역사만을 유네스코에 등재하겠다며 억지를 부리고 있다.
이는 일본 외무성이 앞장서 한국을 ‘도발’한 것이다. 한국을 향해 “국제사회에서 여러 과제를 대응하기 위해 협력해야만 하는 중요한 이웃나라”라고 한 기시다 총리의 발언과도 결이 다르다.
하지만 윤석열 정권은 하야시 외무상의 발언에도 일본에 면죄부를 줄 수 있는 한일정상회담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지난 1월 30일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여권 고위 관계자는 한일관계 개선, 정상회담과 관련해 “윤석열 대통령의 의지가 강하다”라며 “3.1절 전에 역사적인 이정표가 될 만한 결과물을 내놓을 가능성도 있다”라고 했다.
이에 관해 중앙일보는 윤석열 정권의 “첫 3·1절 행사를 앞두고 강제징용 해법 마련과 일본의 수출규제 해제,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정상화 등 양국 현안이 일괄 타결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둘째: 건전한 일한관계
“국교 정상화 이래로 우호 협력관계에 바탕해 일한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되돌리고...” -기시다 총리가 시정연설에서 한국을 향해 한 말.
위 기시다 총리의 말에 화답하듯 지난 1월 27일 윤덕민 주일 한국대사는 ‘한일 경제인 교류의 밤’ 행사에서 “한일 정부가 현안 해결을 위해 열심히 협상하고 있다”라며 “굉장히 중요한 관계 개선의 모멘텀(특정한 현상에 가속도가 붙는 경향)이 형성되고 있다”라고 밝혔다.
그런데 일본이 주장하는 ‘건전한 일한관계’란 1965년 한일기본협정을 기점으로 ‘위안부’, 강제동원 등과 관련해 일본이 한국에 해야 할 사죄·배상이 완전히 끝났다는 것이다. 당시 ‘친일 박정희 정권’은 피해자들과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탄압하고 일본과의 국교 수립을 밀어붙인 바 있다.
최근 윤석열 정권의 움직임 역시 민심에 등을 돌리고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적반하장에 호응한다는 점에서 박정희 정권과 비슷해 보인다. 일본이 진심 어린 사죄와 반성을 하든 말든 한일관계를 개선하겠다는 윤 대통령의 ‘의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지난 1월 29일 윤 대통령은 일본 공동 여당인 공명당의 야마구치 나쓰오 대표를 대통령 집무실로 초청했다.
야마구치 대표는 한반도를 겨눈 일본의 반격능력과 관련해 “한국의 정권이 방위력 강화와 관련해 일본을 배려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은 드물다”라며 “전통적으로 대일관계를 중시하는 (한국의) 보수계도 (일본의) 안보 정책에는 민감하게 대응해” 왔지만 윤석열 정권은 그렇지 않다고 평가했다.(니혼게이자이신문, 2023.1.29.)
역대 한국의 보수 대통령과 비교해 봐도 윤 대통령이 특히 일본에 우호적이라는 평가다.
셋째: 긴밀한 의사소통
“(일한관계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긴밀히 의사소통해 가겠다.” -기시다 총리가 시정연설에서 한 말.
지난 1월 15일(미국 현지 시각) 기시다 총리는 워싱턴에서 열린 미일정상회담을 마치고 받은 강제동원 문제에 관한 물음에 아래와 같이 답했다.
“한국 국내의 구체적인 움직임 하나하나에 의견을 말하는 것은 삼가겠지만 작년 일한정상회담에서의 정상 간 합의가 있고 관계당국·외교당국이 노력하고 있다. 꼭 이 노력을 계속해 나가고 싶다.”
이후 1월 17일 윤 대통령은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한일-일한협력위원회 합동축회에 보낸 축사를 통해 아래와 같이 말했다.
“저와 기시다 총리는 여러 만남을 통해 한일관계 개선 필요성에 대한 의견의 일치를 보았으며 현안을 조속히 해결하고 양국 협력을 확대해 나가자는 데 뜻을 모았다.”
이 과정에는 윤석열 정권 출범 뒤 한국 측이 먼저 꺼낸 ‘일본 전범기업을 대신한 한국의 배상’을 중심으로 한 한일 양국 간의 실무협의가 있었다.
앞서 1월 1일 극우 성향 일본 산케이신문 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26일 서민정 한국 외교부 아시아태평양국 국장은 후나코시 다케히로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과 도쿄에서 만났다. 서 국장은 강제동원 문제에 관해 한국 측이 일본 전범기업 대신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는 해결책을 올해 1월 중에 제시했다고 한다.
이후 서 국장은 지난 1월 12일 국회에서 열린 ‘강제징용 해법 논의를 위한 공개토론회’에서 “일본이 이미 표명한 통절한 사죄와 반성을 성실히 유지·계승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며 ‘피해자들에게 사과하지 않겠다’는 일본 측을 두둔했다.
서 국장과 후나코시 국장은 1월 30일에도 서울에서 강제동원 문제와 관련한 국장급 회의를 열었다. 회의를 마치고 서 국장은 “저와 후나코시 국장은 앞으로도 고위급을 포함한 다양한 단위에서 외교당국 간 긴밀한 소통을 지속해 나가기로 했다”라고 밝혔다.
앞서 언급한 산케이신문의 보도대로 일본이 바라는 해결책을 내기 위해 윤석열 정권이 속도를 내는 것으로 보인다.
윤석열 정권은 일본이 바라는 대로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를 매듭짓는 대가로 한일정상회담을 하겠다는 구상인 것으로 보인다.
마치며
일본은 조선을 식민침탈한 전범국이다. 동시에 과거를 반성하기는커녕 지금까지 적반하장으로 한국을 제재하고 있는 가해국이기도 하다.
지난 2019년 7월, 일본은 한국을 겨눠 반도체 핵심 소재인 불화수소 등 3개 품목 수출을 제재했다. 이어 ‘한국 정부가 일본 전범기업에 배상 명령을 내린 대법원의 판결을 거부해야 제재를 풀 수 있다’라며 한국을 적대해왔다.
그랬던 일본은 지금껏 사과는커녕 제재 조치도 풀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윤석열 정권은 ‘가해국’인 일본의 편에서 저자세로 일본을 위하는 ‘친일본색’에 열중이다.
지난 1월 28일 산케이신문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윤석열 정권이 강제동원 문제에 관해 내놓을 해결책을 지켜보며 제재 해제를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강제동원 문제에 관해 일본에 내 줄 건 다 내주고, 오매불망 한일정상회담에 목매는 듯한 윤석열 정권의 행보는 ‘친일·매국’이라는 비판을 피할 길이 없다.
이는 일제에 고통을 받은 연로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짓밟고 피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행위이기도 하다.
정리하면, 기시다 총리가 시정연설에서 한국을 우호적으로 평가한 배경에는 일본을 위해온 윤석열 정권의 ‘노력’이 있었다.
윤석열 정권이 일본을 위하는 움직임을 이어간다면 ‘더 이상 대한민국호를 이끌고 갈 자격이 없다’는 민심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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