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이 한국 대통령실과 국가안보실을 도청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파장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지난 8일(현지 시각) 미국 유력지 뉴욕타임스는 미국이 한국 등 동맹국들을 도청한 정황이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기밀문서가 작성된 양식을 볼 때 CIA(미 중앙정보국)가 미 정부에 올리는 보고서로 추정된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워싱턴포스트 보도 등에 따르면 유출 문건은 게임 대화용 프로그램인 디스코드, 트위터, 텔레그램 채널 등 미국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퍼졌다. 또 CIA 등 미 정보기관이 한국, 프랑스, 이스라엘, 러시아 등에서 도청한 정보를 담은 기밀문서(top secret) 100여 건 중 50여 건이 유출됐다. 이 가운데 한국과 관련한 도청 내용은 현재까지 최소 2건으로 알려졌다.
여기에는 국가안보실 소속 이문희 외교비서관이 미국의 요구대로 미국에 포탄을 판매하면 포탄이 우크라이나로 갈 수 있다며 우려를 제기하자,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이 미국 대신 폴란드에 155밀리미터 포탄 33만 발을 판매하면 어떻겠냐고 한 내용이 담겼다. 러시아의 눈치를 본 국가안보실이 우크라이나와 가까운 폴란드를 통해 포탄을 우회 지원했다는 것이다.
도청에 관해 미국은 발뺌하고 있다.
여러 보도에 따르면 주한미국대사관 관계자는 “사실관계를 먼저 확인해봐야 한다”라며 “한미 동맹관계는 굳건하다”라고 답했다. 미 국방부도 “이 사안을 적극적으로 살펴보고 있고 법무부에 조사를 공식 의뢰했다”라며 발뺌하고 있다.
돌아보면 미국은 과거부터 다른 나라를 도청하는 불법을 국가 차원에서 저질러놓고 모른 척 입을 닫는 뻔뻔한 행태를 보여왔다.
대표적인 사건이 1976년 10월 워싱턴포스트의 보도로 알려진 이른바 코리아게이트다. 보도에 따르면 당시 CIA는 박정희 대통령이 로비스트 박동선을 통해 미국 국회의원들에게 뇌물을 먹여 자신을 둘러싼 군사독재 얘기가 나오지 않도록 손을 썼다는 대화 내용을 도청했다.
2013년에는 CIA 전직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로 미 국가안보국(NSA)이 주미 한국대사관 등 ‘정보 수집 대상 국가’ 38개국의 재미 공관을 도청한 사실이 드러났다.
스노든의 폭로 이후 미국은 재발 방지를 약속했지만, 이번 도청 사태는 미국이 이후에도 동맹국과 비동맹국을 가리지 않고 계속 도청을 해왔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런 미국에 윤석열 정권은 어떤 대응을 하고 있을까?
10일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유출됐다고 주장하는 자료 대부분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내용이다. 미국에서는 유출 자료 일부가 수정되거나 조작됐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특정 세력 의도가 개입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라면서 “우리나라 말고 다른 나라들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살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라고 답했다.
이 관계자는 ‘우리 측의 자체적인 진상규명 노력도 이뤄지고 있느냐’라는 물음엔 “(한미) 양측에서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라고 답해 논란을 자초했다. CIA가 도청을 바탕으로 기밀문서를 만들었다는 보도대로라면 범인에게 공동 조사를 요청한 셈이다.
국힘당 지도부도 미국을 전혀 비판하지 않았다.
이날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최고위원회의를 마치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우선 사실 확인이 필요한데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도·감청이 있었는지 등에 대한 자체조사가 선행 돼야 한다”라면서 “이 사안이 불거지게 되면 누가 이익되는지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3국 개입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라고 했다.
반면 진보민주개혁 진영에선 도청 사태의 중심에 있는 미국을 강하게 비판하는 분위기다.
10일 더불어민주당은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국회 운영위원회, 외교통일위원회, 정보위원회, 국방위원회 등 상임위를 즉각 소집해 국회 차원에서 대응하자는 방침을 세웠다.
미국발 도청 사태에 관해 최고위원회의에서 “매우 심각한 사태”라고 운을 뗀 이재명 대표는 “대한민국은 주권국이고 한미는 동맹 관계”라면서 “일국 대통령실이 도청에 뚫린다는 것도 황당무계하지만 동맹국 대통령 집무실을 도청한단 것도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개탄했다.
박홍근 민주당 원내대표는 미국을 향해 “양국의 신뢰를 정면으로 깨뜨리는 주권 침해이자 외교 반칙”이라면서 “도청 보도가 사실이라면 우리 국민과 정부에 정중한 사과와 함께 재발 방지를 확실히 약속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지난 5일 전주에서 치러진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강성희 의원이 당선되면서 원내정당이 된 진보당도 10일 논평을 냈다.
진보당은 논평을 통해 “윤석열 정부는 미국 정부에 강력히 항의하고, 기밀문건에 대한 모든 정보를 요구하며 미국 정부의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받아내야 한다”라면서 “불법 도·감청 행위에 항의조차도 못하는 윤 정부의 태도가 한심하고 비굴하기 짝이 없다”라고 규탄했다.
10일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상무집행회의에서 “마땅히 우리 정부는 즉각 미국 정부를 향해 이와 관련한 사실 규명과 사과, 재발 방지를 요구해야 한다”라며 “한미정상회담 성사에 목매고 미국에 한 마디도 못한 채 어물쩍 넘기려 한다면, 주권국가의 대통령 자격상실”이라고 비판했다.
국힘당을 제외하고 미국을 규탄하고 나선 정치권의 반응은 민심의 분노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10일 오후 5시 기준 YTN이 유튜브 채널에 공개한 「[자막뉴스] 한국 감청한 미국...기밀 문건 내용 ‘상상초월’」 보도는 조회 수가 92만 회를 넘었고 4,355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지금도 영상 조회 수와 댓글 수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어 이번 사안에 관한 국민의 관심을 짐작하게 한다.
누리꾼들은 댓글에서 “일본 조공외교 하고도 뒤통수 미국 퍼주기 외교 하고도 뒤통수 한국이 만만하니 일본과 미국이 윤산군을 가지고 노는 것(비****)”, “미국이 동맹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지금이라도 꿈에서 깨어나는 게 좋다(R****)”, “이유는 모르지만 이건 고의적인 유출로 보인다. 미국은 종종 정보유출로 언플(언론플레이)을 하는 국가다(j**)” 등 미국에 분노를 쏟아내고 있다.
또다시 수면 위로 오른 미국발 도청 사태는 앞으로도 쉽게 가라앉지 않고 수많은 의혹을 낳을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오는 26일 미국에서 한미정상회담이 예정된 만큼 국내에서 논란은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10일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출신인 김병주 민주당 의원은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등에 대한 내용 도청은 빙산의 일각일 뿐, 대한민국 대통령실 내부 및 NSC 회의 내용 등이 고스란히 미국에 넘어갔을 공산이 크다”라면서 “이는 대외적으로는 우리 대한민국에 대한 미국의 명백한 주권 침해이면서 국내로서는 특대형 보안사고”라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일부에서는 민주당, 진보당, 정의당 등 진보민주개혁 진영을 중심으로 국회 차원의 항의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등 미국을 직접 규탄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정치권은 ‘미국발 도청 사태’에 분노한 국민의 목소리에 응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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