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헌병이 사할린에서 조선인들을 총살 후 불태웠다러시아에서 관련 기록 기밀 해제돼…학살 이유는 “소련군에 도움을 주었다”
1945년 8월 러시아 극동지역인 사할린주(州)에서 소련 군대의 공세에 직면했던 일본 헌병(군사경찰)이 무고한 조선인 20여 명 이상을 사살한 후 흔적을 없애기 위해 시신을 불태웠다는 공식 기록이 2023년 8월 30일(모스크바 현지 시각) 기밀 해제되었다.
러시아 리아노보스티 통신은 이날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이 사할린주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있는 ‘승리 박물관’에 기밀 해제 문서를 넘겼다며 해당 문서에 위와 같은 내용이 담겼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2차 세계대전 종전과 일본 군국주의 세력을 무찌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오는 9월 2일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열리는 ‘진혼곡(Requiem·레퀴엠)’이라는 명칭의 전시회에서 대중들에게 공개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이번 문서에는 1946년 7월 16일 소련군 방첩 기관 ‘스메르쉬’가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실시한 이두복(일본명 ‘구니모토 도후쿠’)에 대한 심문조서 사본이 포함돼 있었다. 이두복은 1945년 당시 일본 헌병에 조선인들을 ‘소련군에 도움을 주었다’, ‘소련 간첩이다’라고 신고하고 일본 헌병의 학살을 은폐하는 데 일조한 매국노다.
당시 사할린주 북부는 소련 영토였지만 북해도(일본명 ‘홋카이도’) 위에 있는 사할린주 남부는 일본이 점령하고 있었다. 그러다 나치 독일 항복(1945.05.08.) 3개월 후 일본 공격에 참여하기로 했던 소련이 1945년 8월 8일 일본군 무장 해제에 전격 돌입하면서 사할린주에 대한 공세가 시작되었다.
1945년 8월 15일부터 탄광 마을인 가라후토청 가미시스카 마을(현 사할린주 포로나이스크 지역 레오니도보 마을) 인근에서 소련군과 일본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수세에 몰린 일본 헌병들은 잔혹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일본 헌병은 8월 17일 조선인 18명을 붙잡아 가미시스카 경찰서로 연행했다. 그리고 붙잡아온 조선인들이 소련군을 도운 간첩이라며 기소한 데 이어 바로 다음 날 재판이나 조사도 없이 총살했다. 그리곤 이를 은폐하기 위해 경찰서에 벤젠을 뿌리고 불을 지른 뒤 퇴각했다가 다음 날 아침 현장으로 돌아와 타지 않은 시신을 찾아 석탄 더미 위에 던져 완전히 태우는 등 잔학한 면모를 보였다.
이두복도 이와 관련해 “가미시스카 헌병에게 체포된 조선인 18명은 총살됐고, 처형 직후 경찰서 건물에 불이 나 살해된 조선인의 시신은 그곳에 안치됐다”라고 진술했다.
이 같은 사실은 1992년 유족의 정보공개 청구에 처음으로 알려졌지만 이번에 완전히 기밀 해제 되어 확실히 진상이 공개된 것이다.
1992년 당시 김수영 한인연합회장과 학살 피해자의 딸인 김경순 씨는 러시아 연방보안국에 문서 공개를 요청해 학살사건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조사와 재판 기록을 찾아냈다. 수사 기록에는 이두복이 신고하고 2명의 일본 헌병이 38식 소총으로 조선인을 학살한 것으로 드러나 있었다.
소련군 방첩 기관에서 작성한 1945년 8월 30일 자 현장 검사서에는 “불탄 경찰서 건물 내 다섯 곳에서 11구, 화장실 구덩이에서 1구, 본건물 4미터 옆 불탄 목조 건물 내에서 4구 등 16구의 시신을 발견했다”라고 나와 있었다.
현장 검사서는 특히 “화장실 구덩이에서 꺼낸 시신 1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불에 타 머리뼈, 턱뼈, 넓적다리뼈, 팔뼈, 정강이뼈 등 뼈만 있었고 잠긴 쇠 수갑 3개도 함께 발견됐다”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사건 당시 경찰서에서 총을 맞은 뒤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던 신학순 씨(당시 44세)를 대상으로 1946년 6월 4일 작성한 진술조서는 당시 상황을 좀 더 명확히 설명해주고 있었다.
신 씨는 진술조서에 “8월 16일 저녁 조선인 다나카 분기치(김경백) 씨 집에서 나, 김 씨, 김 씨 아들 등 7명이 술을 마시다 이유도 모르고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경찰서에는 우리 7명 외에 또 다른 조선인 11명이 있었다. 순사 하나가 ‘조선인들이 모여 (소련) 간첩 말을 한다’라고 말했을 뿐 아무런 심문도 없었다”라고 답변했다.
신 씨는 이어 “다음날인 17일 순사들이 2명씩 다른 방으로 끌고 가 총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총살이 끝난 뒤 경찰서에 불을 질렀다. 나는 가슴과 팔에 경상을 입고 죽은 척하다 경찰서가 불타기 시작할 때 산속으로 도망쳤다. 같은 해 11월 와타나베라는 조선인 1명도 그 당시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라고 진술했다.
그런데 일본 헌병의 조선인 학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할린주의 다른 곳에서도 일본 헌병이 학살을 저질렀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이와 관련해 KBS도 2023년 8월 16일 「“최소 35명 학살”…78년 전 사할린섬에서 무슨 일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를 내었다.
사할린 곳곳에서 공세를 받던 일본 헌병은 일본 주민들까지 동원해 1945년 8월 20~25일 사할린주 남부에 있던 미즈호 마을(현 포자르스코예 마을)에서 어린이, 여성을 포함해 조선인 35명을 학살했다.
당시 소련군 방첩 기관에서 확보한 61살의 농민 윤양원 씨의 증언에는 “1946년 2월 말에 나는 지금 일하고 있는 어류 공장에서 미즈호 마을로 소를 사러 갔다. 그곳에는 한국 이름으로 채정환이라고 하는 친한 친구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집에 없었고 대신 일본인 아내 사토 미사코시가 자기 남편은 이미 작년 8월에 없어졌다고 말했다. (…) 그녀는 남편이 살해당했다고 고백했다. 8월에 소련군이 마오카(현 사할린주 남서부 홈스크)에 상륙했을 때 일본 헌병의 명령에 따라 미즈호 마을의 모든 조선인이 살해당했다고 했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콘스탄틴 가포넨코, 장한나 역, 『사할린 미즈호 마을의 비극』, 새문사, 2015, 18~19쪽.)
또한 1946년 6월 15일 미즈호 마을 출신 항구 노동자 오시네이 이시오를 심문한 기록에는 “저희 가족은 8월 22일 아침 도요사카에군으로 대피했다. 저녁에는 하시모토 가족, 호소카와 가족이 도착했다. 하시모토 스미요시는 내게 ‘일본이 항복하게 된 이유는 조선인들 속에 소련 간첩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즈호 마을에서 그자들을 죽인 거야’라고 비밀스럽게 말했다. 또 그는 자기도 조선인을 죽였으며 호소카와 히로시, 가쿠타 쵸지로, 그리고 이름은 모르지만 모리시타라는 성을 쓰는 사람도 함께 가담해 죽였다고 했다. (…) 하시모토 스미요시는 후에 아무에게도 이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라고 적혀 있었다. (콘스탄틴 가포넨코, 위의 책, 20~21쪽.)
소련 국가보안부 유즈노사할린스크 담당 수사관의 심문 기록에선 “8월 21일인가 22일에 내 남편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경찰관 이시다가 조선인들을 한곳에 모아 모두 서른 명 가까이 죽였다”라는 내용이 등장했다.
이외에도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비슷한 학살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또 다른 기밀 해제된 문서에선 일본군이 소련과의 전쟁을 위해 결핵균과 파라티푸스균을 토대로 세균 무기를 개발했고 관련해 중국인과 소련 국민을 대상으로 끔찍한 비인간적 실험을 자행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학살을 저질러 진실을 은폐하려던 일본의 추악함과 잔학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또한 조선인이 소련에 도움을 줬다는 이유로 학살하는 모습은 100년 전 조선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던 관동대학살을 떠올리게 한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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