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9일~10일(현지 시각) 인도 뉴델리에서 진행된 G20 정상회의는 별 성과 없는 ‘맹탕’으로 끝났다는 평가가 많았다. 하지만 이는 이전까지 G20을 주도해온 미국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돌아보면 러시아 등 미국에 맞서는 나라들의 시각에서는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
본래 G20은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가 터지자 미국이 주도해서 설립됐고, 첫 정상회의도 미국에서 열렸다. 미국으로선 기존 서방이 모인 G7만으로는 자신의 경제 위기를 해결하기 어려우니 ‘개발도상국, 신흥국도 미국의 위기 극복을 위해 한 몫 거들라’라고 한 셈이었다.
그런데 이번 정상회의에서는 미국 등 서방 우위였던 G20의 구도가 중러를 비롯해 개발도상국, 신흥국 중심으로 역전됐음을 보여주는 장면이 여럿 있었다.
G20 뉴델리 정상회의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1. 바이든 직접 참석했지만…러시아 규탄은 쏙 빠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G20 정상회의에 직접 참석한 것과 달리 중국과 러시아 정상은 참석하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리창 국무원 총리, 러시아에서는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부 장관이 대신 참석했다.
그런데 바이든 대통령이 참석했음에도 미국은 정상이 빠진 중러에 밀려 맥이 빠진 모습을 보였다. 특히 이번 정상회의에서 ‘미국의 패권 쇠락’을 보여준 결정적인 장면이 있었는데 바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사안이다.
미국은 앞서 올해 3월 열린 G20 외교부 장관 회의에서 러시아를 향해 “정당성이 없는 침공”을 했다며 “필요한 만큼 긴 시간 동안”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겠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이어오는 인도와 다른 G20 회원국을 향해 ‘러시아 규탄’을 강조하자고 압박한 것이다.
이를 두고 서방 주요 언론에서는 G20 정상회의에서 중러의 반대로 공동성명이 나오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잇따랐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관측과 달리 공동성명은 빠르게 나왔고, 바이든 대통령은 G20을 통해 러시아를 규탄하려 한 자신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모디 총리는 정상회담 첫날 “모든 (회원국) 팀들이 열심히 일한 덕분에 우리는 G20 정상회의 (공동)선언에 대한 합의에 이르렀다. 나는 이 선언 채택을 선언한다”라고 밝혔다.
예상을 깨고 신속하게 나온 뉴델리 공동선언에는 ▲ 유엔 헌장에 따라 모든 국가는 어느 국가의 영토 보전과 주권, 정치적 독립에 반해 영토 획득을 추구하기 위한 무력 사용이나 위협을 자제해야만 한다 ▲ 우크라이나 상황에 대한 다른 견해와 평가가 있었다 등의 내용이 담겼다. 미국이 주장한 러시아 규탄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이는 지난해 11월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 발리 선언을 통해 “대부분의 회원국은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을 강력히 비난한다”, “러시아 연방의 우크라이나 침략”을 명시했던 것과는 큰 차이다.
심지어 모디 총리는 이번 정상회의가 ‘지정학적 경쟁의 장이 아니’라는 이유로 우크라이나를 초청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도는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하는 러시아에는 같은 기준을 적용하지 않았고, 미국이 보란 듯 러시아의 손을 들어줬다.
BBC에 따르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부 장관은 9월 10일 기자회견에서 러시아 규탄이 빠진 뉴델리 선언에 관해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솔직히 말해서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는 러시아가 바라는 문구를 주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라며 “이제 남반구는 서방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라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여기서 ‘남반구’는 지리상 주로 남반구에 있는 신흥국과 개발도상국을 이르는 말로, 주로 북반구에 있는 미국 등 서방 국가와 비교해 쓰는 표현이다.
정상회의에 러시아 국제협력대사 자격으로 참석한 스베틀라나 루카시는 “우크라이나 상황은 협상이 매우 복잡했다. 무엇보다 브릭스(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및 동반자들의 집단적 입장이 결실을 봤다”라고 했다. 이번 공동성명 채택 과정에서 러시아를 비롯한 브릭스 국가의 의견 일치가 있었음을 밝힌 것이다.
미국은 서방 각국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규탄’을 명시한 공동성명을 채택하려 했으나 중러와 몇몇 G20 회원국들이 반대해 무산됐다고 9월 10일 미국 CNN 등이 보도했다. 러시아 규탄 내용이 빠진 공동성명이 채택되면서 미국의 의도가 무산됐다는 것이다.
9월 15일 미국 CNN에 따르면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뉴델리 선언에 영토 보전과 주권, 민간 시설 공격, 평화에 관한 내용이 담겼다며 이러한 내용이 러시아를 겨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모스크바 등 러시아 영토로 자폭 무인기를 보낸 우크라이나에도 적용되는 원론적인 비판이다.
앞서 우크라이나의 올레그 니콜렌코 외무부 대변인이 페이스북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침공과 관련해 G20은 자랑스러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며 불만을 터뜨렸는데, 이에 관해서도 설리번 보좌관은 뉴델리 선언에 관한 우크라이나의 문제 제기가 없었다고 둘러댔다.
설리번 보좌관의 해명으로 국제사회에서 입지가 좁아진 미국의 처지만 더욱 부각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2. 아프리카연합 가입…개발도상국, 신흥국의 입지 강화
55개국이 함께하는 아프리카연합(AU)이 가입한 것도 이번 G20 정상회의에서 눈에 띄는 장면이다.
인도는 G20 정상회의의 주요 목표로 남반구 국가들의 참여를 통한 G20의 포용성 강화를 제시하며 AU를 G20에 초청했다. AU는 유럽연합(EU)에 이어 지역 단체로서는 두 번째 회원이 됐는데, 이로써 G20 내 개발도상국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지게 됐다.
이에 관해 마키 살 세네갈 대통령은 ‘G20이 서구 중심의 불공정한 관행을 바로잡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긍정했는데, 미국으로서는 탐탁지 않은 결과다.
내년 의장국을 맡은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은 “부의 편중”, “수백만 인류의 굶주림”, “지속 가능한 개발이 위협” 등을 사례로 들며 개발도상국의 어려운 경제 상황을 지적했다.
이는 그동안 제국주의 행보 등으로 국제질서를 주도해온 미국과 서방을 비판한 것으로 풀이됐다. 룰라 대통령은 내년에 열릴 G20 역시 미국이 아닌 브라질 같은 신흥국이 주도권을 잡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또 9월 10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등의 보도에 따르면 중국은 이번 정상회의에서 오는 2026년으로 예정된 미국의 G20 정상회의 개최를 반대하기도 했다. 비록 서방의 반대로 중국의 제안이 통과되지는 않았지만, 중국이 자신의 반대를 기록으로 남겨 달라고 하면서 미국의 체면이 구겨졌다.
이런 분위기를 볼 때 오늘날 G20이 더 이상 미국이 주도하는 판이 아니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앞으로 G20은 개발도상국, 신흥국 위주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이번 정상회의에서는 국제사회의 분위기와 정반대로 가는 특이한 움직임(?)이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23억 달러(대략 3조 원) 이상을 추가 지원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정상회의에서는 러시아를 규탄하는 공동성명조차 채택되지 않았는데 윤 대통령이 회의장의 분위기도 파악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평가가 나온다.
세간에서는 윤 대통령이 미국만 쳐다보다가 국제사회의 흐름조차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G20, 미국, 패권 관련기사목록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