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국 때문에 힘들다는 미국의 고백
올해 8월 말 중국이 수준급의 반도체 기술을 활용한 최신형 스마트폰을 출시했다. 이에 관해 9월 19일(현지 시각) 지나 러몬도 미 상무부 장관은 미 하원 청문회에서 “속상하다”라고 토로했다.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수출 통제를 관장하는 고위 인사가 공개 자리에서 감정을 털어놓은 건 특이한 일이다.
조 바이든 정부는 ‘중국이 반도체를 통해 정보를 빼돌려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라며 미국산 첨단 반도체와 반도체 장비의 중국 수출을 통제해왔다. 또 삼성과 SK하이닉스 같은 동맹국의 기업에게도 중국에 첨단 반도체를 수출하지 말라고 노골적으로 압박했다.
하지만 결국 중국은 자체 기술로 상당히 높은 수준의 반도체를 만들었고, 러몬도 장관의 “속상하다”라는 발언도 이 과정에서 나왔다.
중국 IT 기업 화웨이는 8월 29일 러몬도 장관의 방중 기간에 맞춰 7나노미터 반도체 기술을 활용한 메이트 60 프로를 출시했다. 메이트 60 프로에 들어간 반도체는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중국 최대 파운드리(위탁생산) 업체 중신궈지(SMIC)가 생산했다.
메이트 60 프로 출시 이후 중국의 반도체 자립이 현실화됐다는 관측이 쏟아지자 미 정치권은 이를 애써 부정하며 ‘중국이 그런 기술을 가질 리 없다. 분명히 미국의 첨단 반도체를 빼돌린 것’이라며 증거를 찾겠다고 한 바 있다. 하지만 미국은 지금까지 이렇다 할 증거를 내놓지 못했다.
미국은 왜 이렇게까지 중국의 반도체 기술 확보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까.
중국이 빠르면 오는 2028년 미국의 경제 규모를 넘어설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미국은 정부 차원에서 중국의 기세를 꺾기 위한 대책을 세웠다.
앞서 설명했듯 조 바이든 정부는 미국산 첨단 반도체와 장비의 중국 수출을 틀어막으려 했다. 이는 반도체를 활용한 중국의 제품 생산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적에게 이기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괴롭히거나 버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계책)이었다. 미 정부의 대중 제재 발표가 나오자 엔비디아, 테슬라의 최고경영자가 ‘미국은 중국의 시장을 잃으면 큰일 난다’라며 공개 반발할 정도였다.
미 정부로선 자국 대기업의 반발을 무릅쓸 만큼 대중 제재를 통한 미국의 반도체 기술 패권 유지에 사활을 건 것이다.
여기에는 전기차, 스마트폰 생산 등 산업 전반에 쓰이며 ‘미래 먹거리’로 평가되는 반도체 기술만큼은 중국에 뒤쳐질 수 없다는 미국의 절박감이 반영됐다고 할 수 있다. 미국으로선 반도체 기술을 쥐고 있으면 중국이 미국 주도의 산업 공급망, 생산망을 넘볼 수 없을 것이란 판단도 했을 법하다.
2. 7나노미터 반도체 개발의 의미…미국의 근심
화웨이의 메이트 60 프로에 쓰인 7나노미터 반도체가 어떤 의미인지도 주목할 만하다.
나노미터는 반도체 생산에 쓰이는 단위로 숫자가 낮을수록 미세한 공정이 가능하고, 반도체의 성능을 더욱 크게 끌어올릴 수 있다. 예를 들어 2018년 당시 미국의 애플이 아이폰을 만들 때 7나노미터 기술이 활용됐는데 현재 아이폰에는 4나노미터, 3나노미터 공정이 쓰인다. 이렇게 보면 중국이 미국을 상당히 따라잡게 됐음을 알 수 있다. (한국경제, 「“중국, 이 정도일 줄은…” 화웨이 휴대폰 분해 결과에 ‘깜짝’」, 2023.09.05.)
반도체 업계에서는 미국, 미국과 협력하는 네덜란드 업체 ASML이 독점한 노광 장비(반도체에 전기 회로를 새기는 필수 장비) 없이 중국의 기술만으로 7나노미터 반도체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놀라운 일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실제로 메이트 60 프로를 입수해 내부를 뜯어본 미국의 블룸버그통신 등은 ‘7나노미터 반도체 기술이 활용된 게 맞다. 최신 아이폰 만큼 속도가 빠르다’라며 중국의 기술력을 인정하는 보도를 내놨다.
미국의 대중 제재가 오히려 중국의 반도체 자립만 도왔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중국에서는 반도체 수출 통제를 강화한 러몬도 장관을 향해 ‘러몬도 덕에 최신형 스마트폰을 만들 수 있었다’며 러몬도 장관에게 감사함(?)을 전하는 합성 그림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유행하고 있다. 미국의 대중 제재가 오히려 중국의 반도체 자립을 도와줬다는 조롱이다.
이 와중에 미국의 관점에서 또다시 곤혹스러운 보도가 나왔다.
9월 20일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중국 최대 메모리 반도체 업체인 창장메모리(YMTC)가 반도체 장비 국산화에 거의 성공해 반도체 자립에 한 발 더 전진했다고 보도했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에 따르면 창장메모리 관계자는 “연초 정부가 지원한 70억 달러(대략 9조 3,000억 원) 보조금을 받아 반도체 장비 국산화에 매진한 결과”라며 “베이징에 기반을 둔 국내 장비 업체와 협력해 장비 국산화에 거의 성공했다”라고 밝혔다. 창장메모리는 그동안 미국의 ‘램 리서치’에서 반도체 장비를 수입해왔는데, 제재로 활로가 막히자 자체 생산을 시도해 성공 단계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는 미국이 반도체 설계 기술과, ‘반도체의 뇌’에 해당하는 비메모리 반도체 기술을 쥐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이 미국을 넘어서기엔 한계가 있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중국이 예상 밖의 빠른 속도로 치고 나오면서 ‘조만간 중국이 반도체 분야 전반에서 미국을 넘어서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점차 높아지는 게 사실이다.
만약 중국이 반도체 분야 전반의 자체 생산에 성공하게 되면 미국의 산업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이렇게 되면 미국 패권의 추락 속도는 훨씬 빨라지게 될 것이다.
현재 미국이 중국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반도체 수출을 막기 위한 ‘추가 제재’ 정도밖에 없다. 실제로 러몬도 장관은 첨단 기술로 만들어진 반도체가 중국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기업 통제와, 대중 제재를 더욱 강화하겠다는 발언 외에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 역시 중국의 반도체 자립을 막을 수 있는 근본 대책이 아니라는 점에서 중국을 바라보는 미국의 근심은 갈수록 더해질 것으로 보인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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