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1월 18일은 이창기 기자의 5주기입니다. 이창기 기자를 추억하는 사람들이 보내온 추모 글과 시를 소개합니다. 열 번째는 윤태은 씨의 글입니다. (편집자 주)
내가 기억하는 이창기 선배님
이창기 선배님과 나는 사실 깊은 인연이 있는 관계가 아니다. 그럼에도 내 삶에 너무나 큰 영향을 미치셨고 지금도 그리운 마음이 가득하다.
대학생 때 언젠가 굉장히 좋은 기회로 선배님들을 모시고 사람의 인생관에 관한 강연을 진행했다. 당시 나는 사회자였고 이창기 선배님은 토론 참여자로 함께하셔서 처음 이야기를 나눠볼 기회가 있었다. 언뜻 딱딱해 보였던 첫 인상과 달리 이창기 선배님은 굉장히 재밌으셨고 강연은 즐겁게 진행됐다. ‘운동하는 삶’에 관해 무겁지 않게 편안하고 장난스럽게 이야기해 주셨던 기억이 있다.
강연 내용보다 더 인상 깊었던 것은 강연이 끝나고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는 ‘페미니즘’에 대한 대학생들의 생각이 각각 달랐고 이창기 선배님의 농담과 견해를 불편해하는 일부 여성 대학생들이 있었다. 그 대학생들이 선배님의 특정 표현이 불편하다고 이야기했는데 그 말을 듣고 이창기 선배님은 “아 학생 동지들은 그 말이 불편한가”라면서 그 어떤 부정적인 표현도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선배님께서는 억울하실 수도 있는 그 상황에서 약 30살이나 더 어린 후배에게 사과하셨다. 돌아보면 시 「바보과대표」를 쓴 선배님 자신이 바로 바보과대표였던 것 같다.
그리고 얼마 뒤 한 행사에서 선배님을 또다시 마주했다. 원로 선생님들을 맨 앞자리에 모시고 문화제를 했는데 마지막 대동놀이를 할 때 권오창 선생님께서 어깨춤을 추기 시작했다. 권오창 선생님께서 덩실덩실 춤을 추시는데 이창기 선배님이 옆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정말 환하게 웃으시며 같이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 어찌 그리 해맑게, 그리고 어찌 그리 흥겹게 선생님을 모실 수 있었을까. 그 미소가 지금까지도 강렬하게 인상에 남아있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무대 앞으로 나가 권오창 선생님 손을 잡고 같이 어깨춤을 췄다. 많은 후배들이 권오창 선생님과 함께 춤을 추는 분위기가 되자 이창기 선배님은 잠시 다른 곳에 가셨다. 아마도 이창기 선배님은 마저 취재하시느라 사진을 찍으시거나 기사 내용을 다듬는 등 다른 일을 하셨던 것 같다. 그런데 마지막 대동놀이가 끝날 무렵 이창기 선배님은 나에게 오시더니 “동지 춤을 참 잘 추네”라며 엄지를 들어 올리고 웃으셨다. 춤을 잘 췄다고 칭찬했다기보다는, 원로 선생님을 모시고 정겹게 춤을 추는 후배에게 한 감사의 표현이었던 것 같다.
난 이창기 선배님이 참 좋았다. ‘혁명의 길’을 걷는 모든 선배를 존경하고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어쨌든 선배님이 참 좋았다. 그래서 이창기 선배님의 투병 소식을 들었을 때 너무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한때 선배들과 우리나라의 사회 문제에 관한 방송을 했다. 방송이 끝나고 이따금 뒤풀이할 때 한 막걸리 집에 가면 이창기 선배님이 다른 선배님들과 함께 계셨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때 나는 이창기 선배님께 철없이 몇 번인가 술도 따라드렸던 것 같다.
돌아보면 나는 이창기 선배님을 뵐 때마다 선배님의 어두운 피부와 어두운 입술색이 그저 ‘인상이 그러시겠거니’라고 생각했다. 선배님의 투병 생활 중 어떤 것도 도와드리지 못하고 병문안으로만 얼굴을 내비쳤던 것이 새삼스레 죄송해진다. 선배님과 더 인연이 깊고 친한 동지들이 해야 할 영역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선배님이 떠나시기 이틀 전 학생 동지들과 선배님의 마지막 병문안을 했다. 너무나 마른 모습으로, 너무나 좋지 않은 안색으로 누워계신 선배님을 뵈었다. 눈물을 흘리는 게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계속 눈물이 났던 것 같다. 겨우겨우 울음을 참으며 방북취재 하실 때 우리도 꼭 데려가 달라고, 힘내시라고 이야기를 드렸다.
선배님은 우리들에게 “민족은 위대하다. 반드시 통일은 된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선배님의 의지와 신념이 가슴속에 깊게 박혔다. 아마 그때 선배님은 마지막 남은 모든 기력을 짜내 우리들을 맞이해 주신 것이 아닌가 싶다. 당시 병간호를 담당하시던 선배님은 지금까지 이창기 선배님이 계속 누워있고 기력이 없으셨는데 후배 동지들이 오니 일어나서 이야기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그런 이창기 선배님의 의지면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 것이라고 확신했다. 병문안을 마치고 가려는 학생들에게 선배님은 홀로 몸을 일으키기도 힘드신 상황에서도 차비로 하라며 지갑을 열어 5만 원을 쥐여 주셨다.
이후 더 많은 학생과 병문안을 올 날짜도 잡고 선배님께 힘을 드리기 위해 학생 동지들이 응원 영상을 찍었다. 하지만 그 영상은 이창기 선배님을 떠나보내는 영결식 자리에서 틀어졌다. 그리고 선배님의 손때가 묻은 5만 원은 그때 그 상태로 지금까지 내 지갑에 들어있다.
이창기 선배님의 육신은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선배님의 장례식장에서 너무나 많이 울었다. 인연도 깊지 않은 한참 어린 후배가 눈물을 묵묵히 참는 선배들 옆에서 너무나 눈물을 터트려 대니 당시 윤한탁 선생님께서 내 손을 꼭 붙잡고 “동지 왜 이렇게 우는가?”라면서 “고맙다”라고 하셨다. 당시 학생들은 눈물을 흘리며 ‘우리들이 이창기가 되어 선배님의 그 길을 따라갈 것’이라고 발언했다.
나는 이창기 선배님의 뜻을 이어가겠다는 학생들의 말이 헛된 것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애도라면, 그 뜻을 따라가는 것은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란스럽게 애도한 만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창기 선배님의 그 길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신념이 흔들려서 마음이 약해질 때도 이런 결심이 변하지 않아야 하기에 휴대전화 배경 화면도 이창기 선배님의 사진으로 바꾸었다.
얼마 전 이창기 선배님의 삶과 뜻을 추억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이창기 선배님과 일면식도 없던 한 후배가 내게 휴대전화 배경 화면이 이창기 선배님의 사진으로 되어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후배의 말을 듣고 4년 가까이 이창기 선배님의 사진을 휴대전화 배경 화면으로 해뒀음을 깨달았다.
이창기 선배님은 나에게 수호신과 같은 역할을 해주셨던 것 같다. 서울에 있다가 낯선 대전으로 내려오면서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는데, 못난 표현은 했을지라도 결국 반성하고 제정신을 찾아 활동했던 것은 늘 마주했던 선배님의 사진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창기 선배님 덕분에 조금은 스스로 반성하고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요즘 대전에서 대학생 후배들을 만나면서 이창기 선배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나는 선배님을 통해 이 친구들이 나의, 그리고 선배님의 진정한 동지가 되었으면 한다고 생각했다. 선배님이 먼저 걸어가신 그 길을 대학생 후배들과 함께 걸어가고 싶다. 꽃향기 그윽한 그곳에서 다시 이창기 선배님을 환히 웃으며 마주할 그날을 바란다.
진보통일운동가 민족언론인 이창기 동지 5주기 추모행사 추모위원 모집 ◆ 기간: 11월 17일까지 ◆ 추모위원비: 2만 원 이상 (계좌: 우리은행 1002-240-084597 예금주-김영란) ◆ 추모위원 가입 링크: https://bit.ly/이창기추모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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