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1월 18일은 이창기 기자의 5주기입니다. 이창기 기자를 추억하는 사람들이 보내온 추모 글과 시를 소개합니다. 열한 번째는 대학 시절 이창기 기자를 만났던 류모 씨의 글입니다. (편집자 주)
다방면적인 종합 예술인
창기 형은 풍물도 잘 치고 춤도 잘 추고 시도 잘 짓고 글도 잘 썼습니다. 그야말로 종합 예술인이었습니다.
저는 창기 형을 대학교 3학년 때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문예학교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전대협 문예학교는 일주일 동안 진행됐습니다. 대학생들은 오전에 대강당에서 전체 강의를 들었고, 오후에는 나뉘어 강의를 듣고 토론도 했습니다.
그때 저는 창기 형을 치산이 형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창기 형은 서울지역대학풍물패연합(서풍연) 의장이었습니다. 창기 형이 풍물 강의를 하면서 토론도 이끌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일주일 동안 창기 형과 지내면서 창기 형이 문예일꾼으로서의 자질을 다 갖춘 실력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우리 동기들과 후배들도 모두 창기 형에게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저 형처럼 되고 싶다’라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창기 형에 관해서는 특히 인상 깊은 기억이 있습니다. 창기 형은 오갈 데 없는 아이를 농악대 동아리방에서 키우다시피 했고, 그 아이를 문예학교에도 데려왔습니다. 문예학교에서 창기 형과 술도 한잔하면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때 그 아이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창기 형은 참으로 인정미가 넘치는 일꾼이었습니다.
문예학교 마지막 날 실천 투쟁을 나갔는데 창기 형의 지도를 받은 풍물패가 명동에서 풍물을 치며 기습 시위를 했습니다. 그때 창기 형이 흰 고무신을 신고 풍물 장단에 맞춰 춤을 추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우리는 창기 형을 만난 후 달라졌습니다.
창기 형을 만나기 전까지는 풍물을 치면서 술이나 마시고 학습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문학예술이론에 대한 관심도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형을 통해서 배우고 느끼면서 문예이론, 종자론 등 학습을 열심히 하게 되었습니다. 또 문예일꾼의 임무에 대해 고민하면서 문예일꾼으로서의 자세도 바로잡았습니다.
창기 형은 당시 대학가에서 최고의 문학상으로 평가되던 임수경 통일문학상을 수상한 사람입니다.
전남대에도 5월 문학상이 있었지만 가장 알아주는 상은 임수경 통일문학상이었습니다. 노동계의 전태일 문학상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예과학 분야에서 상을 받았는데 풍물 굿에 대한 논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리는 형의 논문을 읽고 학습도 많이 했습니다.
형은 시 분야에서 성균관대가 주관하는 심산문학상도 받았습니다. 제가 군대를 다녀오니 형의 시집 『바보과대표』, 『10분사랑』이 출간되어 후배들이 많이 보고 있었습니다.
요즘 촛불집회에서 촛불 풍물단을 이끌고 있는데 창기 형 생각이 많이 납니다. 창기 형은 서울지역대학풍물패 연합(서풍연) 의장을 했으니 아는 풍물패도 많았을 것입니다. 창기 형이 지금 살아계셨으면 서울 지역 풍물패 사람들도 소개해 달라고 하고, 촛불 풍물단을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 조언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때 수도권 풍물패에서는 창기 형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창기 형이 떠난 것이 안타깝고 보고 싶습니다.
비록 저는 창기 형처럼 살지는 못하지만 창기 형은 저에게 ‘삶의 표상(본을 받을 만한 대상 -편집자 주)’입니다. 창기 형은 제 마음속에서 항상 따라 배우고 싶은 사람, 닮고 싶은 실력가입니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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