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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찾아서] (11) 미군의 융단폭격과 민간인 학살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기사입력 2024/03/08 [15:36]

[사람을 찾아서] (11) 미군의 융단폭격과 민간인 학살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입력 : 2024/03/08 [15:36]

지춘란은 빨치산에 배속되기 전, 미군 전투기의 무차별 폭격에 대해 부군 황금수에게 “우리는 조국해방전쟁(6.25전쟁) 때 전상자들을 소달구지로 태우고, 미군의 공습을 피해 밤에 월경하여 임시 야전 병원에 놓아두고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낮에는 산속에서 쉬었다”라고 미군 폭격 때문에 겪은 간호 요원의 활동 어려움을 이야기했다.

 

또한 황금수는 지춘란의 빨치산 시절에 대해서 “미군 비행기가 돌아다니면서 휘발유를 뿌리고, 폭탄을 비처럼 떨어뜨려 불에 타죽게 하려고 했다. 우리는 기름 냄새로 감지해서 피해 다녔다. 그러다 보니 다섯 명 정도의 소부대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증언했다. 

 

전쟁 초기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이남 일대를 장악했지만, 이북지역은 지상과 달리 전혀 다른 전황이 전개되었다. 미 공군은 전쟁 발발 후 주로 북한 공군 항공기를 파괴하는 데 주력했다. 당시 북한은 226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문서와 자료, 1950~53년』, 국사편찬위원회, 2006.)

 

그런데 북한지역에 대한 공습을,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가 명령한다.

 

이후 미 극동공군의 B-29 중폭격기들이 북한의 주요 교통 및 산업 중심지에 대량 폭격을 가하며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 나무위키

 

북한지역 공습의 최초 명령자,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한국전쟁 60주년 특별기획 『역사학의 시선으로 읽는 한국전쟁』(휴머니스트, 2010)에 실린 김태우의 「무제한전쟁을 향하여: 한국전쟁기 미 공군 공중폭격작전의 성격 변화」 연구 논문이다.

 

“한국 시간으로 1950년 6월 26일 오전 6시, 맥아더는 수원 비행장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서 우연히 북한 야크기와 미국 무스탕기의 공중전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맥아더는 공중전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후 제공권 장악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미 극동공군 사령관 스트레이트메이어(George E. Stratemeyer)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맥아더에게 제공권 장악을 위한 북한지역 즉시공격을 요청했다. 맥아더는 현장에서 이를 승인했고, 이 지시는 즉각 실행으로 옮겨져 6월 29일 오후 제3폭격전대의 평양비행장 폭격으로 이어졌다.

이날 맥아더는 작전구역을 북한지역까지 확대하라는 트루먼의 명령 하달 전에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북한지역 폭격을 명령했다. 이는 미 공군의 북한지역에 대한 최초 공습이었다. 아무리 전쟁의 적대국이라고 할지라도, 적대국 수도의 비행장을 폭격하는 결단이 대통령의 허가 없이 전구 사령관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이례적이다.”

 

그리고 미 공군은 북한의 5개 주요 도시(평양, 성진, 나진, 원산, 진남포)를 비롯한 여러 도시를 무자비하게 폭격했다.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전쟁 초기 6개월간 미 극동군 공군 사령관을 지낸 에멋 오도넬은 1951년 1월 중순 미 상원 청문회에서 “한국에는 더 이상의 폭격 목표가 없다.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전 한반도는 단지 끔찍한 잿더미일 뿐이다”라고 증언했다.

 

그리고 김진계는 『어느 ‘북조선 인민’의 수기 조국(상)』(현장문학사, 1990)에서 미군의 북한지역 무차별 폭격에 대해 폭로한다.

 

“미군이 참전한 이래 가장 무서운 공격은 비행기 폭격이었다.

미군 비행기가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밤낮으로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폭격하기 시작하면서, 인민군 점령지역에도 수많은 사상자가 났다.

미군기는 밤이 되면 공중에 내내 떠있다가, 불빛이 조금이라도 흘러나오는 곳은 번개처럼 무차별 기총소사하고 엄청난 양의 폭탄을 투하했다. 흡사 들판에서 놀고 있는 햇병아리 한 마리를 보고 수십 마리의 독수리가 벌떼처럼 달겨드는 꼴이었다.”

 

미군의 ‘공중봉쇄전역’, 질식전

 

중국지원군의 5차 전역 2단계가 끝난 5월 22일 이후, 전선은 대체로 38선을 따라 대치 단계로 접어든다.

 

전쟁 전의 38선 상태는 아니지만, 미군과 한국군은 동부전선에서 38선을 넘어 동해안의 산악지대를 차지한다. 서부전선은 중국지원군과 북한군이 38선 이남 개성과 판문점을 포함한 평야 지대와 연안반도, 옹진반도를 점령했다.

 

이런 대치 상황에서 미군은 2백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에 엄청난 병력 부족 현상이 발생했다. 그래서 미군과 한국군은 방어선 하나를 뚫는 데에도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미군은 이런 대치 상태와 병력 손실을 막기 위해 공군력과 해군력을 무제한 투입했다. 그야말로 융단폭격(絨緞爆擊), 초토화 작전이었다.

 

홍학지는 전쟁 회고록 『중국이 본 한국전쟁』에서 미군의 융단폭격을 증언한다. 

 

“1951년 7월, 그들은 조선 북부에서 엄청난 홍수가 발생한 기회를 틈타 우리에게 여름, 가을 공세를 발동하는 동시 우리 후방에 대규모의 ‘공중봉쇄전역’ 즉 ‘질식전’을 시작했다.

‘공중봉쇄’는 1944년 3월 연합국 공군이 이탈리아 국경 내에서 독일군이 사용하던 철로를 주요 목포로 일으킨 한 차례의 공중전역을 미국이 본뜬 것이다. 그 전역은 최초의 공군 합동 공세로 일컬어지고 있다가 후에 ‘질식전’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조선 반도의 지형, 교통선의 구성 및 미군 공중봉쇄 계획이 모두 이탈리아에서 진행했던 ‘질식전’과 아주 비슷했다.

‘질식전’의 구체적인 작전은 조선 반도를 가로지르는 허리 부분에서 차단할 수 있는 곳을 정해 공군과 해군 항공대의 대부분을 동원, 오랜 기간 무차별 융단폭격을 감행한다는 것이다. (중략)

미 공군 조종사들은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비행시간이 1천 시간을 넘는 베테랑들이었다. 그들은 비행술이 뛰어나 초저공 비행을 능사로 삼으며 낮에는 산골짜기의 목표물을 찾아내고 밤에는 실낱같은 등불조차 발견해서는, 폭격을 일삼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또한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전개과정』(태암, 1989)에서 “사실상 공군의 임무란 압록강과 두만강에서 한반도를 가르는 것이었으며, 또한 반도를 도려내면서 해상 봉쇄와 함께 적의 보급선을 파괴하고 후퇴를 촉진시켜 그들을 패배시키고자 실시하였던 계속적인 폭격의 장으로 주민들을 몰아넣으려 한 것이었다”라고 공중 폭격의 임무에 대해 말했다.

 

필자는 미군범죄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전민특위) 조사위원으로 미군의 무차별 폭격 학살 현장을 조사한 적이 있다. 대표적으로 조사한 곳이 영동 노근리 학살지와 단양 곡계굴 네이팜탄 폭격지 등이다. 

 

필자는 『월간 말』과 『민족21』에서 일할 때 ‘통일역사기행단’을 만들어, ‘전북 빨치산 기행’과 ‘6‧25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지 탐방’ 그리고 ‘미군 폭격에 의한 집단 학살지 탐방’을 진행했다. 노근리에는 기행단과 함께 2003년 처음 답사 했다.

 

미군의 노근리 ‘인간 사냥’, ‘모든 피난민들을 향해 사격하라’

 

미군 전투기는 전선만이 아니라, 남북을 가리지 않고 전세를 뒤집기 위해 민간인 거주 마을과 민간인을 피아(彼我)를 조금도 구분하지 않고 무차별 공습했다. 무방비 상태에 있는 사람을 기총사격(機銃射擊)으로 살상하고 수많은 마을을 무차별 폭격했다.

 

대표적 미군 학살이, 1950년 7월 26일에서 29일까지 248명이 사망한 영동 황간면 노근리 사건이다. 400여 명이 희생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강준만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 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에서 미군의 3박 4일간의 노근리 인간 사냥에 대해 생존자 증언을 통해 사건을 재구성했다.

 

“7월 26일날 충청 영동군 황간면 임계리와 주곡리 마을에 미군이 나타나 주민들에게 마을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그 미군은 제1기갑사단 제7기갑연대 제2대대 H중대(중화기 중대) 군인들이었다. 미군의 명령에 따라 500여 명의 피난민이 4번 국도를 따라 인근 마을 노근리에 당도하였다. 

피난민들은 미군의 지시에 따라 경부선 열차의 철도로 올라섰다. 그때 미군의 무전 연락을 받은 미군 전투기 2대가 나타나 주민들을 향해 무차별 폭격을 하였으며 지상의 미군들도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 철로 위에서만 최소 100여 명이 사망했다.” 

 

전쟁 수행에서 고려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민간인의 생명이다. 민간인의 협조가 없으면 결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그런데 미군은 민간인을 작전에 귀찮은 존재로 여겼다.

 

강준만은 미군이 조선인의 목숨을 하찮게 보는 강한 인종차별주의에 대해 같은 책에서 기록을 남긴다. 

 

“미군은 한국인의 옷을 ‘흰 파자마’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흰 파자마’를 입은 사람을 누구나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했다. 영국의 전쟁 특파원 레지날드 톰슨은 『한국의 통곡』이라는 책에서 ‘미군 헌병들은 적들을 사람처럼 이야기하지 않고 원숭이처럼 취급한다’라고 썼다.” 

 

또한 강준만은 같은 책에서 노근리 사건을 44년간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으로 폭로한다.

 

“노근리 사건은 44년간 ‘잊혀진 사건’ 아니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으로 머물러야 했다. 1994년 6월 노근리 사건 대책위원회가 꾸려져 정부 요로에 진정서와 탄원서를 냈지만 모두 답이 없었다. 노근리 사건은 『조선인민보』 50년 8월 19일자가 6단 크기로 상세히 보도한 이래로 94년 4월 29일 연합통신에 의해 첫 보도가 이루어지고 『월간 말』 94년 7월호에 의해 상세히 다루어지기까지 44년간 언론매체에서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99년 9월 미국 AP통신이 보도해 세계적 이슈가 되고 나서야 한국에서도 노근리 사건이 큰 이슈가 되었다. 99년 10월 초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과 한국 대통령 김대중이 진상 규명 지시를 내렸다. 2001년 1월 12일 클린턴은 사과 성명을 냈다. (중략) 당시 학살 현장에 있었던 한 미군 병사는 그때로부터 49년이 지나서도 ‘아직도 바람 부는 시절이 되면 어린아이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고 고백했다.”

 

미군의 단양 곡계굴 네이팜탄 폭격

 

1951년 1월 20일, 미군은 충청북도 단양군 곡계굴에서 네이팜탄 폭격을 했다. 곡계굴 주위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미군 바(Bar) 7사단장이 알몬드(Almond) 10군단장에게 보낸 편지이다.

 

“화염에 휩싸인 마을과 집들에서 나온 연기가 단양 인근의 계곡들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중략) 사람들은 왜 미군이 적이 없는 마을을 불태우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중략) 집들을 불태워 이미 8천 명의 피난민이 발생했고 앞으로 더 많아질 것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노인, 장애인, 어린아이들입니다. 이 작전이 가져올 끔찍한 영향과 비교할 때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빈약합니다. 저는 무차별적인 이 소각작전을 선별적 소각으로 대체할 것을 건의합니다.” (출처 : KBS청주 한국전쟁 70주년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그날 곡계굴’)

 

또한 곡계굴 생존자 엄한원 씨의 증언이다.

 

“냉기를 피해 굴 바닥에 깔아두었던 짚더미에 불이 붙고, 유독가스로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땔감이 없어 나무란 나무는 모조리 베어버렸던 시절이라 도대체 불이 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흙바닥이 타고 있지 뭡니까. 유황처럼 끈적이는 것이, 손에 묻으면 불이 붙었어요. 

바위로 된 굴이라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숨을 참으면 살 수 있겠다 싶었는데... 결국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 나만 이렇게 살아 남았습니다.”

 

필자는 전민특위 조사위원으로 당시 생존자의 처참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곡계굴은 석회암 자연 동굴로 좁은 입구에도 불구하고, 83m의 길이와 복잡한 지형으로 피난처로는 안성맞춤입니다. 혹시 몰라 청년들은 도망칠 수 있도록 굴 밖 논두렁 등지에 숨어 있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미군 비행기가 곡계굴 입구에 기름(?)을 뿌리고 난 후, 하강하면서 폭탄을 던지는데 완전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네이팜탄이라고 하더군요. 불길이 치솟으면서 연기가 굴 내부로 유입되면서 마을 사람들은 우왕좌왕했습니다. 일부는 불을 피해 굴 내부로 더 깊이 들어갔고, 일부는 굴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나중에 보니 유독가스로 인해 모두 질식사했습니다. 굴을 탈출한 사람들도 일부는 기총 사격으로 죽었습니다. 다행히 굴에 들어가지 않았던 청년들은 일부 살았습니다.”

 

필자는 이외에도 포항 송골 계곡 미군 함포 사격(1950년 9월 1일, 백여 명 이상 사상), 예천 산성동 미군 폭격 사건(1951년 1월 19일, 51명 사망) 등을 조사했다.

 

‘미군의 학살 만행 진상 규명을 위한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전민특위)’는 2005년 공동백서를 발간했다. 

 

전민특위 발간 취지 일부이다.

 

“백서는 1945년 9월 8일이 된 때부터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까지, 즉 한국전쟁 전까지의 시기에 전개되었던 민간인 학살 내용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번 백서에서는 미군에 의한 직접학살만이 아니라 이승만 정부의 군·경에 의한 학살, 서북청년단이나 민보단과 같은 민간 극우세력의 학살까지를 망라합니다. 그 이유는 미군정 시기부터 전쟁 시기까지 모든 작전지휘권을 주한미군 사령관이 쥐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지휘계통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당시 최고의 결정권자였던 주한미군 사령관(혹은 유엔군 사령관)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이번 백서에서 폭로된 미군의 학살과 만행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강점 60년 동안 자행된 미군의 학살과 만행, 각종 범죄는 반드시 조사되고, 결산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굴절된 역사를 바로잡고 미군에 의해 희생된 무고한 양민들의 원혼을 달래고 미국 정부에게, 주한미군에게 그 사회역사적 책임을 묻는 것은 결코 백서 몇 권 발간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단결된 민족의 힘은 위대합니다. 미군의 만행을 폭로·규탄하고 주한미군을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전 민족이 굳게 단결하여 투쟁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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