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수석을 역임했던 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은 2월 23일 조선일보에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수출 자제해야 하나?」라는 글을 기고했습니다.
그는 글에서 “정부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공급 자제 방침을 철회하겠다는 발표만 해도 러시아는 전전긍긍할 것이므로 한국 무기의 실제 공급 여부와 규모를 러북 협력의 레드라인을 설정하는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다”라는 흥미로운 주장을 하였습니다.
한국이 우크라이나 무기 공급을 지렛대로 삼아 북러관계를 분열시키는 소위 이간책을 주문한 것입니다.
통할 수만 있다면 윤석열 정부 입장에서 상당히 괜찮은 외교 전술로 보입니다.
이쯤 되면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얼마 전 북한이 일본의 북일정상회담 제안에 호응하는 식으로 한·미·일 공조를 분열시키려고 했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지난달 일본 기시다 총리가 전제 조건 없이 북한을 만날 준비가 돼 있다며 북일정상회담을 추진 중이라고 하자 북한의 김여정 부부장이 “(일본이) 정치적 결단을 내린다면 두 나라가 얼마든지 새로운 미래를 함께 열어나갈 수 있다”라고 반응한 적이 있습니다.
이를 두고 한·미·일의 많은 전문가는 북한이 한·미·일 공조를 약화하려는 의도라고 분석하였습니다.
윤석열 정부는 북일 접촉에서 북한 비핵화를 다뤄야 한다며 북일정상회담에 쐐기를 박으려 하는 등 경계하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들이 경계한다는 것은 북한이 의도했건 안 했건 북한의 입장 발표로 한·미·일에 혼란이 조성되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다시 말해 북한이 북일정상회담을 지렛대로 삼아 한·미·일 관계를 흔들었다는 것입니다.
천영우 이사장은 북한처럼 우리나라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을 지렛대로 삼아 북러관계를 약화하자는 것이지요.
과연 이것이 통할까요?
사실 국내에서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얘기는 전부터 계속 나왔습니다.
지난해 4월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로이터통신 대담에서 우크라이나에 무기 지원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자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안전보장이사회 부의장이 텔레그램에 “한국 국민들이 그들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우리의 파트너인 북한의 수중에 러시아의 최신 무기가 있는 것을 보면 무엇이라 말할지 궁금하다”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또 신원식 국방부장관이 1월 22일 우크라이나를 “적극 지원”하고 싶다고 말하고 미국의 국방부 부대변인이 “매우 자랑스럽다”라고 지지하자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이 “한러관계를 붕괴시킬 수 있는 무모한 행동에 대해 한국 정부에 경고한다”라고 강경한 목소리를 냈습니다.
천영우 이사장의 기대처럼 러시아가 동요하고 북한과 갈등이 생기기는커녕 오히려 한국을 압박하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습니다.
북한이 한·미·일 관계를 흔드는 것을 보고 그것이 멋있어 보이고 그래서 우리도 북·중·러 관계를 흔들어 보자고 마음먹는 것이야 남북이 서로 잘하는 것을 따라 배운다는 차원에서 볼 때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외교 전술이 왜 북한은 되고 한국은 안 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우리 발전을 위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동맹 대국을 향한 자주 외교
첫 번째, 북한식 외교 전술이 통하기 위해서는 먼저 동맹 대국에 자주 외교를 펴야 합니다.
우리 생각과 달리 북한은 러시아, 중국에 자주 외교를 하고 있습니다.
1968년 1월 23일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 영해를 침범하여 정찰하다 북한에 나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미국은 다음날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원산 앞바다에 출동시켰고 이어 항공모함 2척을 추가 배치했으며 전함 25척, 전투기 361대를 동원해 북한을 압박했습니다.
B-52 전략폭격기도 26대나 동원했습니다.
또 소련을 통하여 외교적으로 북한을 압박하려 했습니다.
나포된 다음 날 미 국무부가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에 전보를 보내 소련이 북한에 강력히 항의하며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고 부탁하도록 했습니다.
이후 미 국무부장관이 소련 외무부장관에게 편지를 보내고 미 대통령이 소련 수상에게 편지를 보내며 소련을 거듭 설득했습니다.
당시 소련은 한반도에서 군사 충돌이 발생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북한이 미국에 강경하게 나오자 상당히 불쾌해했다고 합니다.
소련은 미국의 사과를 기다리지 말고 즉시 푸에블로호와 승무원을 송환하라고 북한에 요구했습니다.
소련 총리도 조두환 모스크바 주재 북한 대사에게 상당한 불만을 나타냈습니다.
1968년 4월에 열린 소련공산당 전당대회에서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푸에블로호 나포는 국제 기준으로 볼 때 보기 드물게 가혹한 처사라며 북한을 비난했습니다.
심지어 소련 외무부가 북한 대사를 호출했는데 무시당했고 이에 외무부 차관이 직접 북한 대사관을 찾아갔지만 북한의 삼등 서기관이 마중을 나가는 일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북한은 소련의 요구를 거절하고 전면전을 불사하며 강경하게 대응했습니다.
결국 미국은 북한의 요구대로 영해 침범 사실을 인정하고 “엄숙히 사과”하며 재발 방지를 약속한 사과문에 서명을 하고서야 선원 82명과 시신 한 구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미국은 중국을 통해서도 북한을 압박, 통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미국은 북한이 핵·미사일 시험을 할 때마다 중국 역할론을 강조하며 뭐라도 해보라고 압박했습니다.
지난해 6월 19일 시진핑 국가주석을 만난 블링컨 미 국무부장관이 “중국은 북한이 대화에 나서도록 하고, 위험한 행동을 중단하도록 압박할 특별한 위치에 있다”라며 영향력 행사를 촉구한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그런데 바이든 대통령은 2022년 11월 14일 미중정상회담 직후 기자들의 질문에 “중국이 북한을 통제할 수 있다고 확신하기는 어렵다”라고 답변합니다.
사실 중국이 북한을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미국도 알고 있다는 것을 시인한 것입니다.
중국이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에 반대하여 유엔 안보리 제재에 동참하자 북한이 반발하면서 북중관계가 험악해지기도 했습니다.
2017년 중국이 미국의 요구로 북한산 석탄 수입을 중단하고 대북 원유 수출 중단 등 추가 대북 제재를 언급하자 북한이 조선중앙통신 논평에서 중국 국명을 직접 거론하며 “동북 3성은 물론 중국 전역을 반북 전초기지로 전락시켰다”, “중국은 북중관계의 붉은 선(레드라인)을 넘어섰다”, “북중 친선이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고 해도 목숨과 같은 핵과 맞바꾸면서까지 구걸할 우리가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라고 중국을 맹비난한 일도 있습니다.
이렇게 북한은 러시아, 중국과 친선 관계를 맺고 있지만 이들 나라에 외교적으로 자주 노선을 지키고 있습니다.
러시아, 중국에도 큰소리치는 북한이 미국, 일본에 목소리를 크게 낼 때 미국, 일본도 긴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중러를 통한 북한 압박이 성공할 가능성도 없어집니다.
그런데 한국이 미국, 일본에 굽실거리면서 러시아, 중국에 큰소리친다면 어떻게 될까요?
상대 나라가 웃어버립니다.
‘미국, 일본에 찍소리도 하지 못하면서 어디다 대고 큰소리야, 우리가 만만해 보여?’ 하겠지요.
그래도 한국이 멈추지 않으면 중러가 직접 한국에 경고를 날리고 미일에도 ‘한국을 잘 다스리지 않으면 너네도 큰코다친다’고 하여 미일이 한국에 압박을 가하게 하겠지요.
한국 외교는 원래 미일에 저자세입니다.
2018년 10월 10일 트럼프 대통령이 “그들(한국 정부)은 우리의 승인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며 문재인 정부를 대놓고 모욕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문재인 정부는 미국에 항의 한마디 하지 않은 것은 물론 오히려 미국을 두둔하였습니다.
이런 경향은 윤석열 정부에서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시종일관 친일, 친미 노선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한·미·일 삼각동맹 구축에 적극적이며 일본 자위대와 군사 훈련을 하지 않나, 독도를 분쟁지역이라고 소개하며 팔아먹으려 하지 않나, 강제노역 피해자 배상을 한국 기업이 대신 하겠다며 나서지 않나, 핵오염수 방류를 찬성하지 않나, 아주 가관입니다.
또 한국 경제가 밑뿌리째 흔들리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국의 요구에 따라 중국에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2023년 4월 미 국방부 기밀문서가 인터넷에 유출돼 한국 국가안보실을 도청한 내용이 고스란히 드러났는데 윤석열 대통령실은 “한미 동맹을 흔들 만한 사안은 아니다”, “해당 문서의 신빙성부터 따져봐야 한다”라며 미국 감싸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이러니 중러가 한국 정부를 우습게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러시아는 지난해 12월 7일 대한 강경파로 꼽히는 지노비예프 외무부 아시아1국 국장을 한국 주재 대사로 임명했습니다.
지노비예프 대사는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 지원을 할 경우 한러관계가 붕괴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한·미·일 군사훈련도 방어적 성격이 아니라며 비판한 인물입니다.
게다가 ‘태양절’, ‘광명성절’ 등 북한의 주요 기념일마다 북한 대사관 행사에 참석해 북한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던 친북 인사입니다.
러시아가 이런 인물을 한국 주재 대사로 임명한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지난해 11월 부산에서 4년 만에 한·중·일 외교장관 회담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일정을 바꿔 회담 직후 곧바로 귀국하면서 공동 기자회견과 만찬이 모두 취소됐습니다.
한·중·일 정상회의 일정도 합의하지 못했고 공동 언론 발표문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외교 관례에 따라 윤석열 대통령을 면담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이 역시 무산됐습니다.
미일에 따라 움직이는 한국을 굳이 상대할 필요가 없다는 속내인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친미, 친일 외교를 펼치면 미일이 한국을 잘 대해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거꾸로 무시당하게 된 것입니다.
미국은 인플레이션 감축법, 반도체법을 적용하면서 한국의 사정을 전혀 봐 주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뒤통수를 쳤습니다.
일본은 강제노역 피해자 측이 일본 기업의 공탁금을 정당하게 수령하자 지난 2월 21일 일본 주재 한국 대사를 초치하는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였습니다.
미일이 한국의 피를 사정없이 뽑아 먹고 있는 실정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가능성이 없는 공허한 외교 전술이 나오기도 합니다.
김성한 전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은 3월 1일 조선일보 칼럼에서 “한·중·일 정상회담을 통해 중국이 북·중·러 삼각관계로부터 빠져나오도록 해야, 북한과 러시아의 위험한 거래를 막을 수 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동안 윤석열 정부에서 한중관계를 다 망쳐놓았는데 어떻게 중국을 설득하겠다는 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한·중·일 정상회담 날짜도 잡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자주 외교를 하지 않으면 북·중·러는 물론이고 동맹국인 미국과 일본에도 무시당하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북러관계를 분열시키는 외교 전술이 통할까 싶습니다.
군사력과 경제력
두 번째, 북한식 외교 전술이 통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외교는 기본적으로 힘을 바탕으로 합니다.
힘을 바탕으로 주도권을 가지고 상대국에 자국의 입장을 관철하는 것이 외교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힘이 없으면 외교 전술을 펼치기가 어렵습니다.
여기에서 힘은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집약됩니다.
북한은 어디든 공격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강한 군사력이 근간에 있기에 외교 전술이 먹힐 수 있습니다.
만약에 북한의 군사력이 약했다면 미국은 북한이 어떤 외교 전술을 펼치든 무시하고 힘으로 제압하려 했을 것입니다.
북한 경제는 자립경제를 기반으로 합니다.
미국은 대북 제재를 통해서 끊임없이 북한을 붕괴시키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만약에 북한이 자립경제 정책을 펴지 않았다면 대북 제재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자주 국방력이 있나요?
미국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경제는 어떻습니까?
2022년 기준 한국 경제의 대외의존도는 100.6%입니다.
경제 제재를 받으면 금방 무너질 것입니다.
북한은 작은 나라임에도 자주 외교 노선과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중러에도 자주 외교를 하고 있고, 전문가들이 평한 것처럼 한·미·일 관계를 흔들어 대고 있습니다.
우리도 북한처럼 북·중·러 관계를 흔들어 대고 싶으면 북한처럼 미일에 먼저 자주 외교를 해야 하고 자주국방과 자립경제를 튼튼히 다져야 하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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