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등장한 ‘비핵화 중간 단계’
정 박(Jung H. Park, 한국 이름 박정현)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부차관보 겸 대북특별부대표가 3월 5일 워싱턴 D.C. 카네기국제평화재단에서 개최한 세미나에서 “궁극적인 비핵화로 향하는 중간 단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미라 랩-후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대양주 담당 선임보좌관도 4일 중앙일보-국제전략연구소(CSIS) 포럼 특별 대담에서 “미국의 목표는 여전히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라면서도 “그러나 비핵화로 가는 과정에서 중간 단계도 고려할 것”이라며 이것이 “역내 및 전 세계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갑자기 연이어 미국 고위 관리들이 ‘비핵화 중간 단계’를 언급한 것입니다.
이런 발언에는 특별한 배경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7일 스탠퍼드대 월터 쇼렌스틴 아시아태평양연구소가 주최한 대담에서 “북한이 전쟁하기로 전략적 결정을 내렸다고 본다”라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은 시그프리드 헤커 교수와 로버트 칼린 미들베리국제연구소 연구원입니다.
헤커 교수는 미국 최고 핵무기 연구소인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장을 지냈고 2000년대에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한 인물로 이 분야의 권위자로 꼽힙니다.
칼린 연구원도 1989~2002년 미 중앙정보국(CIA) 동북아 담당 국장과 대북 협상 수석 고문 등을 지낸 인물로 1996년 이후 30회가량 북한을 방문한 경험이 있어 북한 문제에 정통한 전문가로 꼽힙니다.
두 사람은 1월 11일에도 북한 전문 매체 38노스에 기고한 글을 통해 “한반도 상황이 1950년 6월 초반 이후 그 어느 때보다 더 위험하다”라고 주장했습니다.
헤커 교수는 “이제 북한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고, 핵으로 미국 본토를 위협할 수 있는 3개의 국가 중 하나”라고 진단해 한반도 위기 상황이 한반도에 그치지 않고 미국 본토 위협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언급했습니다.
또, “지금 한반도 상황은 변곡점(힌지 포인트)에 있다”라며 “점차 고조되는 전쟁의 우려를 완화하기 위해 미국 정부의 적극적 개입이 필요하다”라고 하며 한반도 상황에 적극 개입할 것을 미 정부에 주문하였습니다.
칼린 연구원도 “지금 워싱턴이 깨어나야 한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두 사람이 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거듭 요청한 것은 현재 미국이 한반도 상황에 주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못하는 매우 수세적 처지에 몰렸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북한의 비핵화를 추진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북핵을 용인하지도 못하는 상황, 북한을 군사적으로 공격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대북 전쟁훈련을 중단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황이라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대북 적대 정책을 철회하지도 못하고 대북 강경책을 쓰지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미국 고위 관리들이 비핵화 중간 단계를 들고나온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이들은 비핵화 중간 단계를 언급하면서도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습니다.
정 박 부차관보는 중간 단계 조치에 북핵 동결이 포함되느냐는 질문에 즉답을 피했습니다.
무엇을 중간 단계로 보는지 아직 오리무중입니다.
중간 단계를 얘기하긴 했는데 내키지 않다 보니 구체적으로 제시할 것이 없어 그럴 수도 있고, 상대의 반응을 떠 보려고 던져보는 것이라 구체적인 내용을 미리 꺼내 들지 않는 장사꾼 흥정식의 눈치작전이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비핵화 중간 단계가 유의미해지려면…
어쨌든 비핵화 중간 단계라면 핵동결 정도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전에도 북미 협상 과정에서 미국은 핵폐기 전단계로 핵동결을 주장해 왔습니다.
핵동결을 위해서는 서로 요구 조건을 가지고 협상해야 합니다.
서로 주고받는 게 있어야 협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여러 종류로 대량 생산하고 실전 배치까지 완료했으며 끊임없이 신형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동결하려면 미국이 그만한 것을 양보해야 합니다.
미국은 핵동결의 대가로 평화협정이나 북미 수교를 내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이후 북미대화에 관심이 없고 오로지 등가 교환만을 요구합니다.
예를 들어, 북한이 핵동결을 하면 미국도 핵동결을 해야 하며, 북한이 핵군축을 하면 미국도 핵군축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북한에 비핵화를 요구하려면 미국도 비핵화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미국은 중국, 러시아도 비핵화하라고 요구할 것이고 중러는 영국, 프랑스, 인도, 이스라엘의 비핵화를 요구하고 인도는 파키스탄의 비핵화를 요구하는 식으로 해서 결국 모든 핵보유국이 비핵화하는 전 세계 비핵화로 가게 됩니다.
비핵화는 어느 한 나라나, 그 상대방까지 두 나라만 할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미국이 한반도 상황에 적극 개입하려고 비핵화 중간 단계를 제안한 것이라면, 북미가 함께 비핵화 중간 단계를 상정하고 협상한다고 가정할 때 괜찮은 제안일 것입니다.
비핵화 중간 단계를 꺼낸 미국의 의도
그런데 생각해 보면 미국이 협상하려고 했으면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의 협상 조건이 가장 좋았을 것입니다.
당시 회담에서 북한은 영변의 모든 핵시설을 완전히 폐기하는 것을 제안하였고 그 대가로 대북 제재 가운데 민생 관련 부분 해제를 요구했습니다.
그마저도 북한이 합의를 위반하면 자동으로 제재 복귀를 할 수 있다는 이른바 ‘스냅백’ 조항을 넣는 것까지 북한은 양해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영변 핵시설은 당시 북한 핵개발의 핵심 시설이었습니다.
이런 핵시설은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 수 없으며 한번 폐기하면 복구하기 어렵습니다.
반면 대북 제재 일부 해제는 미국이 언제든지 손쉽게 되돌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당시 북한의 제안은 미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건이었습니다.
북한은 손해를 보더라도 미국과 합의를 위해 대담한 제안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미국은 손해 볼 게 없고 오히려 큰 이익인 제안이었지만 거의 합의해 놓고 협상 막판에 뒤집어버렸습니다.
당시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미국식 계산법에 대해서 좀 이해하기 힘들어하시지 않는가, 이해가 잘 가지 않아 하는 듯한 그런 느낌을 받았다”라며 “(미국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 것”이라고 했습니다.
최선희 부상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은 2019년 북미정상회담에서 최상의 조건으로 북한과 합의를 할 수 있었지만 스스로 기회를 걷어찼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왜 합의하지 않았을까요?
북미협상으로 받기만 할 뿐 하나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이기주의, 도둑놈 심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2020년 3월 5일 트럼프 당시 대통령은 북미협상과 관련해 “나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대북 제재들은 유지되고 있다. 나는 어떠한 것도 주지 않았다”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습니다.
장사꾼 사이의 거래라면 이것을 자랑스러워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인 사이의 관계라면 이건 파렴치한 행위입니다.
어떻게 나는 하나도 주지 않고 상대 것만 빼앗겠다고 생각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협상에서 기본 예의도 도의도 없는 것이지요.
국가 간 협상에서도 나는 하나도 안 주고 오로지 받기만 하겠다는 건 그냥 상대국을 약탈하겠다는 것과 똑같습니다.
미국은 하나도 양보하지 않고 다 먹으려는 이기주의에 빠져 협상을 망쳤습니다.
북한은 미국과 이런 협상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와서 2019년 북미정상회담 때와 달리 미국이 진심으로 북한에 대화를 요구할 수 있을까요?
그것도 힘들어 보입니다.
변화의 가능성은 행동에서 드러납니다.
미국이 대화와 협상에 진심이라면 현실에서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한미연합훈련을 중단한다거나 윤석열 정부 이전 수준으로 축소한다거나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올해 미국은 작년보다 2배 이상 한미연합훈련을 하는 등 오히려 더 적대적이고 강경한 행동을 보입니다.
대화와 협상에 전혀 진심이 아니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서 진심도 아닌 비핵화 중간 단계를 들고나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미연합훈련이 시작하자마자 비핵화 중간 단계라는 꼼수를 던진 것은 북한에 혼란을 주기 위한 계략일 수 있습니다.
미국은 대북 전쟁훈련을 하고, 이에 강경하게 대응하겠다고 한 북한에 ‘비핵화 중간 단계’라는 달콤한 사탕을 던져 북한을 헷갈리게 하겠다는 것이지요.
대북 전쟁훈련의 한 영역인 심리전의 결합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는 ‘우리가 비핵화 중간 단계에 나설 수 있으니까 중국이 나서서 중재를 해보라’는 식의 중국 끌어들이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기대와 달리 북한은 연일 한미연합훈련을 비난하면서 대규모 포사격 훈련, 탱크부대 훈련 등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훈련 사진을 보면 특이하게도 북한군 지휘부가 전투복을 입고 있습니다.
그만큼 실전 태세를 강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사상 최대로 강경할 것 같던 한미연합훈련은 하는지 안 하는지 소리 소문도 없으니 누가 강경하고 누가 꼬리를 내리는 것인지, ‘원 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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