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부의 본명은 하준수(河準洙, 1921~1955)다.
남도부에 대한 1차 자료는 판결문과 신문이 있다. 그러나 이 자료들은 주로 전쟁 시기 빨치산과 남도부에 대한 만행과 죄상을 알리기 위해 왜곡과 폄훼가 대부분이었다.
다행히 세월이 흘러 남도부 대원이었던 제3지대 빨치산 생존자 구연철과 성일기의 증언을 토대로 한 『신불산, 빨치산 구연철 생애사』(산지니, 2011)와 정원석 장편소설 『북위 38도선』(교학사, 2006)이 나와 어느 정도 진실을 알렸다.
그리고 노가원의 전설적 남한유격대 총사령관 하준수 일대기 『南道富』(월간 말, 1993)란 다큐멘터리도 나왔다.
또한 2001년 10월 21일,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석동 창녕 성씨 고택에서 남도부 유품 발굴에 참여한 임경석 교수의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역사비평사, 2008)이란 의미 있는 역사 기록도 있다.
특히 이 발굴로 남도부의 유품이 대량 발견됐다. 유리병에서 손잡이를 잘라낸 몽당숟가락과 신문지에 쌓인 ‘비장 문건’ 수첩 그리고 남도부 부대 기관지 『붉은별』 이외에 ‘증명서’, ‘원호증’ 등이 나왔다. 『붉은별』은 남도부 부대 기관지로, 2면짜리 등사판 신문 제44호(1953.2.8.), 제46호(1953.6.25.), 제47호(1953.8.15.)였다.
이뿐만 아니라 지춘란 간호장의 부군인 황금수가 있다. 1차 자료나 유품, 기록 그리고 창작 소설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증언이다.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증언반은 『끝나지 않은 여정 한국현대사 증언론-1』(대동, 1996)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물이나 유적은 ‘국토’에서 발굴되지만, 역사적 가치가 있는 증언은 ‘사람’으로부터 발굴된다”라고 책머리에서 밝혔다.
사료로서 구술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다.
필자 또한 역사는 사실을 규명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열거된 1차 자료와 저서 그리고 증언을 중심으로, 남도부에 대한 허위 사실과 거짓 정보를 밝히고자 한다. 먼저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가명이다.
노가원의 『南道富』에 나오는 한자 가명 ‘南道富’와 ‘南到釜’
남도부의 한자 가명 ‘南道富’는 1954년 남도부의 체포와 공판 기사를 다룬 경향, 동아, 조선 등 신문에서 대부분 사용됐다.
그리고 노가원의 『南道富』에는 책 표지로 사용했지만, 책 내용(『南道富』 하)에는 ‘南到釜’로 나오는 장면도 있다.
“6.25는 남한유격총책 남도부 중장의 ‘南到釜작전’에 모든 작전의 의미가 함축돼 있는 것같이 보인다. 南到釜-남조선 경상남도 부산을 점령하라. 그러나 南到釜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6.25부터 10일 안에 대구에서 합류해 부산으로 선두 돌입하라’는 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과 남한유격총책 남도부의 밀약은 산산이 부서졌고, 인민군과 남한유격대는 그들의 운명과도 같았던 대구-부산을 점령하지 못했다.”
“남도부 중장은 윤인호 씨와 동경에서 헤어진 뒤의 이야기도 해주었다. 학병을 거부한 이야기, 지리산 항일투쟁 때 보광당 이야기, 그리고 강동정치학원 군사교관 때 이야기, 조선인민유격대 제3병단 시절, 다시 월북하여 6.25 그날 남하 침투하기 직전의 이야기, (중략) 자기의 이름이 ‘南道富’가 아닌 ‘南到釜’라는 내력, 즉 김일성 수상이 지령한 ‘南到釜작전’에 관한 이야기….”
임경석 교수는 노가원의 ‘南道富’ 표기에 대해 “남도부를 ‘南道富’로 부르는 것은 당시 신문 기사에 표기된 것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사료 비판을 요하는 정보이지만, 그를 바로잡을 수단이 없었으므로 어쩔 수 없었겠지요. 당시 자료 여건상 불가피한 오류였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의견을 줬다.
왜 노가원이 표지에 ‘南道富’로 사용하고, 본문에는 ‘南到釜’로 사용했는지 추후 확인이 필요하다.
임경석 교수는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에서 남도부 가명의 의미를 추론했다.
임경석 교수의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 ‘南到釜’
임경석 교수의 저서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 ‘8장 산에서 쓴 편지’에 나오는 ‘南到釜’에 대한 설명이다.
“여기서 남도부의 이름에 잠시 주목해 보자. 그의 한자 성명은 ‘南道富’로 알려져 왔다. 남도부가 육군 특무부대에게 체포된 지 약 두 달이 지난 뒤, 도하 신문에는 대서특필로 그의 체포를 알리는 기사가 보도됐다. 「괴뢰 유격대 총사령관 남도부南道富를 생포: 살인, 방화 등만 천여 건」이 그 기사 제목이었다. 그 뒤로 남도부의 이름은 심심찮게 신문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남도부의 한자 성명은 잘못 알려진 것이었다. 이 오해는 소설가 노가원이 『남도부南道富』라는 다큐멘터리를 출간한 이후에 더욱 널리 확산됐다. 하지만 의아하지 않은가? 인민유격대의 사령관이 ‘남도의 부유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자신의 가명을 정했을까? 그럴 리가 없다. 남도부의 한자 표기는 ‘南到釜’다. 상륙 후 한길로 부산을 향해서 진격하는 것, 바로 이것이 그의 새 이름의 진정한 속뜻이었다. 한반도 최남단의 대도시 부산을 점령하는 일은 곧 ‘조국해방전쟁’의 최종 승리를 뜻했다. 그의 새로운 가명 속에는 6.25전쟁을 바라보는 그 나름의 충정과 결심이 숨어 있었다.”
또 임경석 교수는 ‘7장 땅에 묻은 노트’에서도 ‘南到釜’에 대해 설명했다.
“하준수가 남도부라는 가명을 처음 사용한 것은 그즈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제3병단은 일명 ‘동해여단’으로 불렸다. 명칭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빨치산부대의 활동 구역은 영남의 대도시 대구와 부산을 넘볼 수 있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닌 곳이었다. 하준수는 부산을 염두에 뒀다. 한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남한의 제2 도시 부산은 혁명의 최종 승리를 상징하는 곳이었다. 그 도시를 얻는다는 것은 곧 혁명을 전국적으로 완성하는 것을 뜻했다. ‘남쪽으로 부산까지 다다른다’, 바로 이것이 남도부라는 가명에 숨겨진 의미였다.”
임경석은 노가원의 『南道富』에서 언급되는 ‘남도부’의 의미는 ‘작전명’이나, 그는 ‘가명’으로 보고 있다. 전쟁 전부터 사용했다는 것이다.
어떻든 그 외 대부분 책에는 ‘南到釜’를 사용한다.
또 다른 남도부에 대한 허위 사실이다.
남도부에 대한 판결에 나오는 죄목 전문
허위 사실 중 대표적인 것이 남도부가 양민 촌락 등을 기습하여 살인 방화 약탈했다는 것이다. 이는 정전 후 6.25전쟁의 민간인 학살 등의 책임을 빨치산과 남도부 등의 만행으로 몰아가기 위해서였다. 허위 사실 죄목으로 남도부를 이용하고 선전선동했다.
우선 하준수(남도부)에 대한 판결 죄목 전문이다.
“피고인 하◯◯에 대하여 1. 죄목 피고인 하◯◯는 일직히 경남 진주중학을 졸업하고 일본대학전문부를 거처 중앙대학 법학부 3년을 중퇴하고 학병을 기피하여 지이산에 입산은거중 8.15해방과 더부러 하산하여 거리 함양에서 소위 건국준비 위원회장 및 치안대장등에 취임하여 불법활동타가 재차 지이산에 도피입산하여 공산당조식등의 업무에 종사중 단기 4281년 8월경 괴뢰 공산 대의원 입후보차 월북하여 평양교외 강동정치 학원에서 수학후 동학원 군사교관으로 복무중 동4282년 7월 초순경 괴뢰노동당 중앙당부 직속 대남 유격대 제3병단 김◯◯ 부대 부사령관에 취임되어 재차 남하한후 강원 경북 양도를 중심으로한 소위 재산공비의 두목으로써 그 경부터 무려 수십차에 긍한 아 군경과의 교전과 더불어 경찰서를 위시하여 우체국 금융조합 곡물창고 및 군,면 사무소등의 공공시설 및 양민 촌락등을 기습하여 살인 방화 약탈등의 가진 만행을 자행하다가 동4283년 5월경 재차 평양에 월북하여 괴뢰노동당 중앙당 제2비서 이승엽 및 괴뢰 부수상 박헌영 등으로부터 대남유격대총사령관의 임무를 받고 그시경 대남유격대 제7군단을 양양에서 조직 편성한후 전시 괴뢰노동당 중앙단 지령에 의하여 부산 선두돌입점령 임무를 받게되자 동년 6월 24일 밤 군함 4척으로 양양 영포구를 출항하여 동월 25일 조조 강원도 이문포에 불법상육한 이래 동4284년 9월 말경에 지하기까지 그간 경남북도를 중심으로 하여 전시와 동여히 아 군경과의 교전 공공시설에 대한 파괴 및 소각 양민촌락 및 차량들을 습격하여 살인 방화 강탈등의 목불인견의 잔인무도한 공산만행을 계속 감행하는바 그간 거듭되는 아 군경의 토벌작전에 조우되게되자 동4284.10월경 경북 일월산계선에서 이를 이합분산 패퇴 섬멸 일로의 재산공비들을 재규합하여 대남유격 제3지대로 개편한후 동대 지대장으로 취임되어 계속 전시동여한 공산만행을 감행하든 자인바”
하지만 판결문에 대해 남도부 대원 구연철은 허위 사실이라고 반박한다.
구연철의 판결에 대한 반박
구연철의 『신불산』에 나오는 판결에 대한 반박이다.
“남도부에게 사형을 언도한 재판부는 남도부 부대를 중심으로 한 경상남북도 빨치산이 ‘각종 무기 800정과 실탄 20만 발 약탈했으며 군용열차 28회 전복, 군경자동차 670대를 소각했다’고 발표했다. 재판부는 덧붙여 남도부 부대가 2,800명의 군경 및 양민을 학살하고 민가 700호를 소각했다고 발표했는데 이 부분은 완전히 날조된 허위 선전이었다. 교전 과정에서 다수의 군경과 미군을 살상한 것은 사실이지만 민간인에게 피해를 준 일은 거의 없었다. 빨치산을 보고도 신고를 안 했다거나 빨치산을 도와주었다고 주민을 학살한 것은 토벌대였고, 빨치산의 근거지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산간부락을 소각시킨 것도 토벌대였다. 제4지구당과 남도부 유격대의 주된 임무는 임시수도 부산 및 군사령부가 위치했던 대구시를 교란하고 전선과 후방을 연결하는 보급로를 차단하는 일이었지, 민간인 주거지를 점령하거나 소각하는 일이 아니었다.”
구연철은 “가장 많았던 작전이 4~5명의 소속 무장대가 수시로 부산 시내에 침투해 미군의 보급품 적치장이 있던 매축리 제5보급창과 부산철도기지창 등을 기습 교란하는 것이었다”라고 증언했다.
제2전선 역할이 주 임무였던 것이다.
또한 지춘란의 부군 황금수도 “남도부는 전술 전략이 뛰어난 지도자였다. 제2전선의 목적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 아니고, 후방 교란과 보급로 차단 등이었다. 원래 빨치산 대부대 활동은, 빨치산 싸우는 방법이 아니다. 희생이 적고 주어진 조건에서 제2전선 활동을 수행해야 했다. 또한, 민간인으로부터 지원을 받아야 했기에 민간인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했다. 특히, 전투하면서 체포한 사람은 절대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일정 시간이 지나면 돌려보냈다”라고 지춘란이 들려준 이야기를 증언했다.
그뿐 아니라 황금수는 지춘란으로부터 “정전 이후 남도부 전술의 특징은 보통 4~5명이 함께 움직이는 소부대 활동이었다. 거점을 잡고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천막을 가지고 주로 이동했다. 국방군과 경찰은 민가를 소개(疏開)시켜서 파출소는 돌을 쌓아 올려 진지를 만들었다. 또한, 군·경이 고지나 길목을 다 점령해서, 빨치산들은 주로 팔부능선이 주 이동 경로였다”라고 민간인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고 부연(敷衍) 설명했다.
이런 증언으로 보면, 빨치산은 4~5명의 소부대 활동으로 치고 빠지는 전술인데, 민간인을 학살하고 민가를 소각했다고 판결한 것은 날조된 허위 사실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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