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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찾아서] (22) 남도부와 지춘란, ‘고역의 장정’을 마치다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기사입력 2024/08/14 [14:57]

[사람을 찾아서] (22) 남도부와 지춘란, ‘고역의 장정’을 마치다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입력 : 2024/08/14 [14:57]

  ▲ 1954년 3월 12일 자 조선일보 기사. [제공: 한찬욱]

 

 정전 이후 겨울이 오면서 토벌대의 막바지 공세는 더욱 강화되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많은 빨치산이 체포되거나 투항하면서 생존자의 명단이 노출되어 비록 가명(假名)이지만 경찰은 빨치산 수와 무장 상태를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특히 빨치산 자수자나 포로를 편입하여 경찰 전투부대인 ‘사찰유격대’를 만들어 빨치산을 추적하고 있었다.

 

‘사찰유격대’는 1951년 말~1952년 초의 군경의 제1차 대토벌 작전이 끝나고 생기기 시작했다. 이들은 그동안 빨치산 경험을 바탕으로 ‘주간’에만 작전하는 군경과 달리, 당시 함께한 동지들이 ‘야간’에 다니는 루트나 거점에 깊숙이 침투·매복하여 동료들을 학살했다. 그중에서 전라도 지역의 ‘보아라부대’가 악명높았다.

 

‘사찰유격대’는 일제 강점 하의 ‘밀정(密偵)’과 해방공간의 ‘프락치(fraktsiya)’·‘통적분자(通敵分子)’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군경의 개노릇을 하며 토벌에 앞장서 빨치산에게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배신자였다.

 

그래서 빨치산은 의경을 포로로 잡으면 그냥 풀어주고 국방군의 경우 일단 입산하라고 설득했던 데 비해 경찰과 ‘사찰유격대’를 포로로 잡으면 바로 처형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춘란의 부군 황금수는 “남도부는 전술 전략이 뛰어난 지도자였다. 남도부는 제2전선의 목적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 아니고 후방 교란과 보급로 차단 등이라고 했다. 한번은 지서 주임이 체포되었는데 죽이질 않고 일정한 시점이 지난 뒤에 놓아주었다. 후에 빨치산 요원이 체포당했을 때 그는 체포한 사람을 가혹하게 다루지 않고 죽이지 않았다”라고 증언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제3지대 남도부 부대에도 이런 변절자가 있었다.

 

남도부 『비장 문건』 속의 변절자에 대한 처벌

 

조직의 힘은 조직의 통일성에서 나온다. 

 

조직의 통일성은 조직 내의 ‘비와 자비(비판과 자기비판)’을 통한 오류의 극복과 올바른 입장의 정립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뿐 아니라 변절자에 대해서는 엄격한 검증을 통해 처벌했다.

 

남도부는 하산하여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석동 창녕 성씨 고택에서 『비장 문건』을 작성하고 ‘1953년 10월 10일’이란 날짜를 적어 유리병에 넣어 땅에 묻는다. 하지만 이 날짜는 성씨 고택에서 작성한 날짜가 아니고, 10월 10일을 기준으로 작성한 것이다. 추론컨대 산중 아지트에서 남도부가 이미 작성한 것이다.

 

근거는 다음과 같다. 임경석은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에서 남도부의 하산 일자를 10월 6일이라고 했지만, 거점 확보를 위해 선발대로 나간 제4지구당 이구형 부위원장이 일행을 놓쳐 아지트로 되돌아왔기 때문에 남도부의 하산 일자는 훨씬 뒤로 미루어진다.

 

그리고 구연철은 남도부 하산 일자를 1953년 12월 중순으로 분명히 증언했다.

 

아울러 같은 책에서 임경석은 남도부가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상벌에 역점을 둔 공과 사가 분명한 지도자임을 강조했다.

 

“남도부가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역점을 둔 사항이 또 있다. 상벌에 관한 것이었다. 빨치산 투쟁에 헌신적으로 참가해 온 현 생존자들은, 그가 보기에는 혁명과 당의 보물과 같은 존재였다. 그들을 가리켜 ‘여하한 난관과 애로에 부닥치더라도 조금도 동요 없이 당을 위하여 충실히 자기 생명을 바칠 수 있는 동무들’이라고 표현했다. 남도부는 그에 해당하는 인물 17명의 이름을 낱낱이 적었다. 

보고서만이 아니었다. 제3지대 기관지 『붉은별』 제47호는 휴전 이후인 1953년 8월 15일에 발간된, 사실상의 종간호였다. 거기에도 빨치산 유공자에 대한 표창 상신서가 게재되어 있다. 표창 종류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국가 표창 대상자를 추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3지대 표창을 직접 수여하는 것이었다. (중략) 

포상 추천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남도부는 ‘변절자’들에 대해 엄중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보고서 속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적들의 발악으로 인하여 불행히 생포된 분자들과 위축된 분자들이 투항하여 적의 기만적 회유에 빠져 동지들을 팔아먹고 적의 앞잡이의 역할을 놀고 있다.’” 

 

또한 임경석은 같은 책에서 남도부는 투항자에 대한 적대감을 나타냈다고 했다. 투항자들이 단지 전선 이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토벌에 앞장섰기 때문이었다. 

 

“남도부는 그중에서도 악질적인 변절자를 지목했다. 도합 11명이었다. 그들을 가리켜 ‘조금도 용서할 수 없는 당의 원수’이며, ‘인민의 원수’라고 규정했다. ‘이자들에게는 조금도 용서 없이 최고형에 처할 것’을 건의했다.”

 

제4지구당 유일한 생존자인 구연철의 하산 배경

 

제4지구당 지도부가 4개 소지구를 나누어, 일단 간부들이 각자 구역을 맡아 대원을 이끌고 하산한 다음 당을 재건하기로 했다.

 

현재 제3지대 빨치산 유일한 생존자인 구연철의 하산 배경 설명이다.

 

“신불산의 제4지구당도 해산되어 경북도당 및 경남 동부지구당으로 분리되어야 했다. 하지만 30명 잔존 인원만으로 경북도당과 동부지구당의 직책을 나눠 갖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일단 간부들이 각자 구역을 맡아 대원을 이끌고 하산한 다음 당을 재건하기로 했다.

지하당 건설은 이미 여러 차례 강조되었음에도 실천하지 못했는데 하산 여건은 이전보다도 더 어려워져 있었다. 많은 대원들이 체포되거나 투항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의 명단은 경찰에 소상히 파악되어 있었다. 가뜩이나 초라한 행색으로 무작정 내려갔다가 체포되어 처형당하기 십상이었다. 신분증 위조와 돈이며 의복까지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그러나 토벌대는 그럴만한 시간 여유를 주지 않고 끊임없이 밀고 올라왔다.” 『신불산, 빨치산 구연철 생애사』(산지니, 2011)

 

당시 구연철은 토벌대와 ‘사찰유격대’의 매복에 걸려 총알이 가슴을 스친 다음 다시 팔꿈치를 관통한 큰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구연철은 같은 책에서 동료와 지춘란의 간호, 특히 동지애를 인상 깊게 증언했다.

 

“문자 그대로 구사일생으로 생환한 구연철은 동료들로부터 각별한 보호를 받았다. 지구당의 위치는 노출되지 않았어도 겹겹이 포위된 상태라 보급 투쟁이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환자인 그를 위해 우선 식사를 제공했고 상처가 곪지 않도록 매일 새로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주었다. 

간호부장 지춘란과 간호대원의 정성은 특별했다. 한 달 정도 휴식과 치료를 받는 사이 구연철은 완전히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겨울이 오면서 토벌대의 막바지 공세가 더욱 강화되고, 더는 은신할 수 없어 제4지구당은 이동을 결정했다.

 

남도부 하산 예정 일자 지연과 하산이 지체된 원인

 

임경석의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에서 나오는 남도부 하산 예정 일자와 하산이 지체된 이유이다.

 

“남도부의 하산 일자는 10월 6일이었다. 목적지는 제4지구당 지도부 소재지로 내정한 대구였다. 그곳에서 이구형과 접선하여 지하당 사업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안전을 고려하여 대구로 직행하지 않고 중간 경유지를 거치기로 했다. 경상남도 창녕이 바로 그곳이었다.

그러나 하산 공작이 용이하지 않았다. 갖가지 장애가 많았다. 무엇보다도 정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1952년 8월에 중앙당 지시 문건을 접수한 이후 상급 당 기관과의 연락은 사실상 단절되어 있었다. (중략)

기술적인 원인도 있었다. 유격대 역량은 수십 명 수준으로 줄어든 데 반하여 신불산지구 토벌대 879부대의 병력은 천수백 명에 달했다. 이 때문에 연락과 통신 조건이 극히 악화되어 있었다. 보기를 들면, 9월 3일 대구 거점을 구축하기 위해 하산했던 제4지구당 부위원장 이구형은 이동 도중에 일행을 놓치고 말았다. 그 탓에 부득이 산속으로 되돌아와야만 했다. 그는 한 달이 지난 뒤에야 다시 하산 공작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임경석은 남도부의 하산 일자는 10월 6일이라고 했지만, 거점 확보를 위해 선발대로 나간 이구형 부위원장이 일행을 놓쳐 아지트로 되돌아왔기 때문에 남도부의 하산 일자는 아마 논의를 거쳐 미루어진다.

 

그리고 일단 이구형 부위원장의 거점 확보를 위한 하산 공작은 한 달 뒤에 이루어진다.

 

그렇게 볼 경우 남도부의 하산 일자가 언제인지 궁금했다. 다행히 구연철은 남도부 하산 일자를 1953년 12월 중순으로 분명히 증언했다.

 

추측건대 제4지구당 이구형 부위원장이 산으로 되돌아오면서 토벌대 상황과 적정(敵情)을 어느 정도 파악한 것 같았다.

 

구연철이 증언하는 하산 일자와 하산 중 벌인 전투

 

구연철은 같은 책에서 생생하게 남도부 하산 일자와 하산 중 벌인 전투를 증언했다.

 

“1953년 12월 중순, 달빛이 어스름한 밤이었다.

밤 여덟 시경 구연철을 포함한 핵심 간부들이 이동을 시작했다. 지구당에서는 이영섭 위원장과 기요과장, 유격대에서는 남도부 사령관과 부관 등이 함께 했다. 경북지역에 유응재 부대가 있었으나 연락이 두절된 상태로, 사실상 경남지역 최후의 빨치산 지도부였다. 하나같이 지난 수년간 무수히 죽음의 고비를 넘긴 전사들이었다. 그러나 신불산 전역이 토벌대의 주둔지처럼 변해버린 상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개천을 만나 주위를 살피며 차례로 건너려는데 건너편에서 갑자기 수십 개의 불똥이 튀는 동시에 사방에 총탄이 날아와 꽂히기 시작했다. 요란한 총성이 밤하늘을 울렸다.

‘퇴각’

남도부의 다급한 명령에 따라 마구 응사하며 황급히 돌아서는데 지구당 위원장 이영섭이 풀썩 쓰러졌다. 하필이면 소녀대원 김서형이 당한 것처럼 복부 관통상이었다.

지구당 기요과장과 남도부의 부관이 거구의 이영섭을 양쪽으로 부축해 안전한 산 중턱까지 끌어다 눕혀놓고 치료를 하려 했으나 복부 관통상은 치료가 불가능했다. 간호장교 지춘란과 간호대원이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옷을 찢어내고 소독약을 바르고 지혈을 시도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다들 침통하게 둘러앉아 숨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남도부는 하산 전투 속에 군경의 매복이 엄중하며 변절자가 길목을 지키고 있다고 판단했다. 아마 이런 이유로 여성 대원인 지춘란을 팔공산 아지트에 두고 하산 공작을 감행한 것으로 필자는 추론한다.

 

참고로 성일기의 증언을 토대로 한 정원석 장편소설 『북위 38도선』과 노가원의 남한유격대 총사령관 하준수 일대기 『南道富』 에는 남도부 하산과 체포 과정이 거의 창작이라 사료로서는 의미가 없었다.

 

1953년 말부터 1954년 초에 걸쳐 육군 특무대는 제3지대 성원들을 체포했다.

 

제3지대 성원들, 밀고로 체포 당하다

 

임경석은 같은 책에서 남도부를 비롯한 성원들의 체포 순서를 나열했다.

 

“가장 먼저 창녕군 대지면 석동 창녕 성씨네 저택에 은거하던 성일기가 체포됐다. 1953년 12월 27일의 일이었다.

뒤이어 제4지구당 선전조직부장이자 제3지대 부사령관인 유응재가 대구 시내 길거리에서 특무대 요원들에게 체포됐다. 이듬해 1월 16일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3일 뒤인 1월 19일에는 대구 시내에 잠복 중이던 이원량李源良이 검거됐다. 경북 안동 출신인 그는 전쟁 발발 이전부터 김달삼 빨치산부대에 참가한 경력이 있는 노련한 유격대원으로서 남도부 부대 창설 멤버이기도 했다. 그는 남도부로부터 ‘어떤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당을 위해 헌신할 동무’라고 높은 평가를 받은 17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검거는 계속됐다. 1월 20일에는 여성 대원 지춘란池春蘭이 팔공산 산정에 구축한 아지트에서 특별수사대의 기습을 받았다. 북간도 연변 태생의 그녀는 팔로군 출신의 간호장교였다. 1951년 9월 일월산에서 제3지대를 편성할 당시 남도부 부대에 배속된 그녀는 ‘어떤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당을 위해 헌신할 동무’로 평가받은 이다.

제4지구당 부위원장 대리이자 제3지대 사령관 남도부가 체포된 것은 1월 21일이었다. 대구 시내 동인동에 위치한 한 민가에서였다. 그는 잠복조에게 검거되고 말았다. 

불운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제4지구당의 책임자 이구형도 체포를 면하지 못했다. 1954년 3월 대구 시내에서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육군 특무대의 발표에 따르면, 1953년부터 1954년까지 ‘남도부 외에도 30여 명에 달하는 두목급의 괴뢰 유격대 조정자들을 검거’했다고 한다.”

 

황금수는 지춘란으로부터 “남도부 전술의 특징은 보통 4~5명이 함께 움직이는 소부대 활동이었다. 거점을 잡고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천막을 가지고 주로 이동했다”라고 들었다고 이야기했다.

 

남도부는 치고 빠지는 유격 전술을 구사해 정전 이후에도 무려 30여 명에 이르는 유격대원과 당 일꾼을 보유하고 있었다. 남도부는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전 이후 토벌대의 공세에 밀려 논쟁 끝에 당 방침에 따라 ‘대구’ 시내에 지하당을 구축하려는 하산 공작을 감행했다. 

 

비록 간부들의 치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변절자 집단인 ‘사찰유격대’와 당시 하산 대원의 밀고로 하산 공작과 대구 지구당 구축은 실패했지만, (빨치산 투쟁은) 무려 3년여에 이르는 ‘고역의 장정’이었다. 그리고 ‘대구’라는 대도시에 당 거점을 만들려고 한 것은 ‘기상천외한 작전’이었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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