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춘란은 유격대 간호장 전쟁포로임에도 미 군정하에서 공포된 「국방경비법」 제32조 위반 이적죄로 재판을 받고 사형을 구형받았다.
「국방경비법」은 ‘국방경비대’를 유지하기 위한 군법으로 1, 2, 3심이 아닌 단심이다.
남도부는 빨치산 제3지대장이자 조선인민군으로, 장군으로 끝까지 신념과 지조를 죽음으로 지켰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남도부의 총살형이 집행된 것은 1955년 8월로, 서울 근교 수색에 위치한 육군 사형집행장이었다.
그러나 사형을 구형받은 지춘란·유웅재와 무기징역의 문일준, 징역 20년의 이원량의 형 집행 자료는 찾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전 서울교도소 여자 교도관 전온전의 『사형장의 황혼(하), 여자사형수 편』(서음출판사, 1993)에서 지춘란이 사형에서 20년으로 언도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시 육군형무소는 미결수를 수용했고, 형이 확정된 기결수는 지방 등 민간 형무소로 이감시켰다. 그러나 수형 시설 미비로 여사(女舍)는 없어, 지춘란은 서울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수기에 나오는 지춘란의 감옥 생활
전온전의 수기에 나오는 가명 지용녀는 지춘란이다. 이 수기에서 지춘란의 언도 내용이 나온다.
“공비(共匪) 대장인 유명한 남도부(南都夫)의 이야기는 당시의 언론을 통해서 너무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여서 새삼 흥미는 없다. (중략) 여기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람은 바로 그 문제의 남도부의 부하로 있다가 함께 잡힌 지용녀라는 한 젊은 여자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그때 남도부와 함께 일심(一審)에서 사형을 구형받았다가 언도에서 20년으로 감형되어 지금도 교도소의 감방에서...”
또한, 수기에서 전온전은 지춘란의 만주 출생과 성장 과정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만주에서 자랐다. 나이가 차면서 길림성에서 여학교를 다니고 온갖 고생 끝에 성년이 되니까 이번에는 또다시 시련에 부딪히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다. 나라가 없는 설움에, 이번에는 제 나라를 보지 못하는 서러움이 더한층 컸다. 그러나 당시 조국은 둘로 갈리고...”
그리고 전온전은 지춘란이 좀처럼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모범수였다고 했다.
“20년의 형은 결코 짧은 것은 아니다. 더욱 조치령에 의한 형은 감형도 잘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녀는 거의 사형수와 같은 심정으로 살았다. (중략) 그녀의 입을 통해서는 그녀의 과거나 공비들의 세계에 대한 에피소드를 들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물어보는 사람이 오히려 실례다. (중략) 다만 그녀가 너무도 착실하고 (모범수) 건실해서 감방이란 것만을 빼고 보면 거의 가정 부인으로 오인하기 쉬울 정도였다.”
그런데 전온전은 1968년에 『여감방』이란 수기를 출판했는데, 여기에도 「만주에서 피어난 비극의 처녀」라는 제목으로 지용녀가 나온다. 이 책의 출처는 노가원의 『南道富 하』(월간 말, 1993)로 전온전의 1993년 증보판과 내용이 거의 유사했다.
지춘란, 4.19혁명으로 감형받다
노가원은 『南道富 하』에서 지춘란과 함께 재판받은 동료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남도부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남한 최후의 빨치산으로 남았던 그의 부하들은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 다시 감형을 거듭한 끝에 대부분 만기를 채우고 풀려났다.”
‘감형을 거듭한 끝에’라는 내용 중 하나는 4.19혁명이었다.
전북 빨치산 출신이자 비전향 장기수인 임방규는 『사월혁명회보 111호』(2014년 1월)의 「나와 4·19혁명」에서 ‘4월혁명 덕에 감형받고 처우 달라져’라고 증언했다.
“장면 정권이 들어선 후 구속자에 대한 일반 사면이 있었습니다. 군법에서 무기형을 받은 동지들은 20년으로 민법에서 국가보안법으로 무기형을 받은 동지들은 15년으로 유기형을 받은 동지들은 잔 형기의 3분의 1이 감형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모두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일부는 서울에 가구요. 조국통일에 대한 민족적인 열망이 고조되는 때라 남북관계가 잘 풀리면 머지않아서 석방되리라고 보았습니다.”
대부분의 장기수는 4.19혁명으로 형기가 ‘절반’으로 감형받는다.
물론 지춘란 또한 감형받은 것으로 필자는 추론한다.
『南道富 하』에서 노가원은 지춘란이 1968년까지 감옥살이를 하고 만기 출소했다고 했다.
“지춘란은 만기를 채우고 석방된 것 같다. 전 교도관이 수기를 출판할 때인 1968년에도 감옥에 있었으므로 그녀는 13년째 감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출옥한 뒤 지춘란은 을지로에 위치한 병원 간호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지춘란이 출소한 연도는 정확하지 않지만, 출소 후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의 뒷면에 ‘1969 秋夕 날’로 기록된 것이 있다. 배경으로 보아 출소한 것이 분명하고, 그러면 지춘란은 1969년까지 14년을 감옥살이했다.
전온전이 수기에서 지춘란이 20년을 선고받았다고 하였으니, 지춘란은 임방규와 마찬가지로 4.19혁명으로 감형받고 만기 출소한 것이다.
4.19혁명은 학생과 민중의 힘으로 사대 친미 매국 독재자 이승만과 친일 관료를 타도한 우리 역사상 초유의 쾌거였다.
4.19혁명은 단순한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운동이 아니라, 이승만 독재정권을 지탱한 착취·수탈구조, 그리고 친일파를 중심으로 한 외세 의존의 매국 정권, 냉전·분단구조에 대한 민중의 총체적 항거였다.
‘피의 화요일’, 4.19혁명으로 바뀐 구치소 생활
4월 19일 서울 도심, 태평로 광화문 시청 앞 광장 일대는 어깨동무한 학생과 민중의 시위로 물결쳤다. 시위 대열이 이승만 독재정권의 심장부 경무대로 진출하자, 경찰들이 소방차의 물을 뿌리며 일렬횡대로 발포했다. 시위대는 소방차에 올라타 후진을 하며 저항하였지만, 경찰의 발포로 무참히 쓰러진다.
이날 전국 각지에서 경찰의 총격으로 희생자 수는 사망 115명 그리고 부상은 727명에 달하였다.
당일이 화요일이었기에 1905년 러시아혁명처럼 ‘피의 화요일’이라고 부른다.
4.19혁명 직전인 1960년 초에 12명의 장관 중 독립운동 출신자는 한 명도 없고 6명이 일제 관료였으며, 역대 육군참모총장 8명은 전원이 일본군 장교였고 경찰 간부 중 80% 이상이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
해방된 지 언제인데 아직도 일제 출신 관료, 군인, 경찰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었다.
나라가 아니었다.
마침내 일제 강점하에 신음하던 식민지 조국에 태어나 민족해방·민중해방의 숙명을 지게 된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일어났다.
그들은 일제 패망 후의 해방 공간과 6.25전쟁을 전후하여, 우리 앞세대가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죽어 가는가를 보며 소년·소녀 시기를 보낸 학생들로 형과 언니의 길을 따른 것이다.
임방규는 『4월혁명회보 111호』에서 4월혁명으로 바뀐 구치소 생활을 증언했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사지에서 이승만 정권이 타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오죽했겠어요. 우리 민족과 나 자신의 앞날에 희망의 나래를 펼치며 그 밤을 뜬눈으로 보냈답니다. 감옥은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합니다. 세상이 바뀌자 처우가 달라졌습니다. 밥덩이도 커지고 중환자들을 병사에 입원시켰습니다. 독방을 없애고 3, 4명씩 혼거를 시켰습니다. 장기판도 넣어주고요. 책은 물론 운동 시간도 한 시간으로 연장시켰습니다. 바깥소식이 다는 아니지만 제법 들려왔습니다. 대학생 수백 명이 경무대로 진격하다가 총탄에 희생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두가 슬퍼했고 한 몸을 조국에 바친 젊은 영령들을 추모했습니다.”
그러나 4월혁명의 반동,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5.16군사쿠데타 후 ‘반공’을 구실로 혁신계를 소급 구속하다
구치소 생활은 180도로 돌변하고, 반공을 구실로 혁신계 인사들이 불법으로 대량 체포되고 불법 구금됐다.
『4월혁명회보 111호』에서 임방규는 5.16군사쿠데타로 돌변한 구치소 생활을 증언했다.
“어느 날 군인들이 보이데요.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오살귀 또는 오몽뎅이(본명은 오영환)가 방마다 문을 따고 장기판을 회수하면서 ‘편히 살았지. 이제 두고 보라’고 밑도 끝도 없는 말을 던지고 갔습니다. 그게 박정희 일당의 군사쿠데타 이후의 첫 반응이었습니다. 저들은 특별사 주위에 벽돌담을 높이 쌓고 별도로 망대를 구축했으며 망대 위에 중기를 배치했습니다. 언제든지 불을 뿜을 수 있는 기관총이 특별사를 겨누고 있었습니다. 7사도 새로 짓고요. 당국은 준비가 끝나자 각 감옥에 있던 비전향 동지들을 대전 감옥으로 집결시켰습니다.(약 790명) 처우는 전보다 더 혹독했고요. 당국은 1968년에 4개 감옥 대전, 전주, 광주, 대구로 우리를 분산시켰습니다. (처음에는 목포 감옥까지 5개 감옥으로 분산시켰다가 목포 감옥은 바다에서 가깝다고 광주 감옥으로 옮겼음.)”
박정희와 군사쿠데타 주도세력은 ‘반공 국시’를 천명한다.
이승만 정권도 미군정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반공이 국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쿠데타세력은 혁명공약 첫째에 “반공을 國是(국시)의 제1義(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 체제를 재정비 강화할 것입니다”라고 더욱 반공을 강조한다.
그리고 군사혁명위원회의 이름으로 내려진 지시에 따라 사회당, 사회대중당, 혁신당,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전국피학살유족회, 한국교원노동조합연합회(교원노조),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 전국민족통일학생연맹(민통련) 등 18개 혁신계 정당·사회단체의 핵심 인물들을 체포한다.
군사혁명위원회는 혁신계가 바로 용공세력이라 규정한다. 그리고 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는 여순항쟁에 가담한 자신을 부정하고, 미국으로부터 사상 검증받기 위해 반공을 내세우며 무자비하게 혁신계 인사를 구속한다.
체포된 인사는 쿠데타 후 5월 16일부터 21일까지 6일 동안에 무려 2,014명이나 된다. 또한 두 달 동안 예비검속된 용공 혐의자도 모두 3,098명으로 집계됐다.
나라가 외세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
박정희는 이후 「예비검속자 제헌절 출감조치에 한 담화(1961. 7. 17)」 등으로 두 차례에 걸쳐 이 가운데 2,560명을 석방 조치하였다. 예비검속된 용공 혐의자가 너무 많아 석방한 것이다.
1961년 6월 22일,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특별법)을 군사혁명위원회는 제정한다.
특별법 제6조는 특수반국가행위에 대해 “정당·사회단체의 주요 간부의 지위에 있는 자로서 국가보안법 제1조에 규정된 반국가단체의 이익이 된다는 정을 알면서 그 단체의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하거나 또는 기타의 방법으로 그 목적 수행을 한 행위를 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라고 명시한다.
그런데 이 특별법은 헌법이 금지하는 소급법이다.
이 소급 특별법은 법이 공포된 날로부터 3년 6월까지 소급해 법을 적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특별법으로 5.16군사쿠데타 뿐만 아니라 1957년 12월 이후의 행위까지도 용공세력으로 몰아 처벌했다.
1961년 7월 12일 혁명재판소가 출범하면서 혁명검찰부는 465명을 기소한다. 216명이 특별법 6조(특수반국가행위) 위반 혐의로 46.5%에 달한다. 그리고 216명 가운데 190명이 유죄판결을 받는다.
이때 나중에 황금수에게 지춘란을 소개해 준 최만리 사회대중당 중앙당 부녀위원장도 ‘사회대중당 사건’으로 유죄를 받는다.
당시 여성 구속자는 박정숙, 주명희(주명순), 최생금, 최순자, 최춘자(최정윤), 한정숙 등 대부분 사회당 출신이었다. 추론컨대 주명희와 부부 관계를 맺고 있던 최백근 사회당 조직부장의 영향이 컸다고 본다.
작년 12월 17일 수암 최백근 선생 62주기에서 황금수는 “그 시절 최백근 선생은 참으로 걸출한 지도자셨습니다. 박정희는 그야말로 미국의 주구로 1979년 10월 26일 부하의 손에 죽을 때까지 국가보안법으로 저지른 학살 만행을 결코 민중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이 발악하는 소리,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선생은 ‘나라가 외세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라고 자주 말씀하셨는데, 민중은 선생의 뜻을 받들어 미국과 줄기차게 싸워 지배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라고 추모 결의를 했다.
황금수 또한 4월혁명 공간에 사회당 중앙당 노동부장, 민자통 노동위원장, 통민청 성원으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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