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에 대한 두 가지 시선
그의 생전에 건립된 이 동상은 청산돼야 할 주권국가의 흉물이다
지하철 1호선의 가장 끝자락인 '인천역' 인천역에서 내리면 입구에 '경인선 출발지' 라는 머릿돌을 볼 수 있다. 경인선은 제물포-노량진 간 33.2km를 운행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이며 1899년 9월 18일 개통되었다. 인천역은 우리나라 교통의 출발지인 셈이다.
인천역을 뒤로 하고 길 건너편에 차이나타운이 있다. 차이나타운을 끼고 10 분정도 걸으면 자유공원에 들어서게 된다. 자유공원은 인천시 중구 송학동에 위치한 응봉산 전체를 말한다. 이 공원의 최정상에 맥아더 동상이 있다. 1957년 10월 3일에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다.
2005년 5월 10일 몇 몇 시민단체가 맥아더 동상의 철거를 요구하며 7월 17일까지 69일 동안 농성을 벌였다. 그 후 해마다 9월이 되면 맥아더 동상 철거 문제로 논란의 중심이 되곤 한다. 경인선이 개통되었던 9월은 맥아더와도 인연이 깊은 달이다.
1945년 9월 8일은 존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군 제24군단 예하 7사단 병력이 인천항을 통해 한반도에 들어온 날이다. 미군은 상륙과 동시에 태평양방면 육군 최고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 명의로 북위 38도선 이남의 한반도 지역을 점령하며 동시에 미군이 직접 통치하는 미군정을 실시한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1950년 9월 15일은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되었던 날이다. 오랫동안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의 영웅이자 한국의 적화를 방지한 은인으로 숭배되어 왔다. 그러한 보편적 통념에 반기를 든 것이 2005년 5월의 ‘맥아더동상타도특위’라는 시민단체였다. 그들은
첫째, 맥아더는 민족 분단의 원흉, 미군정의 야만적인 범죄행위의 기획자, 집행관이었다.
둘째, 맥아더는 노근리 학살을 비롯하여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을 교사 혹은 묵인한 전쟁범죄자이다.
셋째, 맥아더는 핵무기로 우리 민족을 말살하려 한 전쟁미치광이였다.
넷째, 맥아더는 권력에 환장한 한낱 정치군인에 지나지 않는다.
다섯째, 맥아더 동상을 그대로 두는 것은 민족의 수치이며, 자기의 얼굴에 침을 뱉는 부끄러운 일이다.
등의 이유를 들어 맥아더 동상 철거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다. 맥아더에 대한 평가는 그의 고국에선 벌써부터 엇갈리고 있었다. 그의 업적뿐 아니라 인격문제까지 거론하고 있는 형편이다. 찬탄과 숭배, 경멸과 혐오라는 극단적 평가로 양분되어 있는 것이 미국 내의 두 가지 시선이다.
어쩌면 미국보다 더욱 깊은 관계라고 할 수 있는 한국에서 이제야 맥아더의 공과에 대한 논란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한편으론 놀랍기만 하다. 맥아더는 한국을 구한 은인인가 혹은 단순한 전쟁광에 지나지 않은 인물인가? 맥아더에 대한 본격적인 탐험에 들어가기 전에 그의 아버지 아서 맥아더(Arthur MacArthur, Jr.)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필리핀 총독 아서 맥아더의 등장
아서 맥아더는 1845년 6월 2일 매사추세츠 스프링필드에서 출생했다. 밀워키의 성공한 변호사이자 정치인의 아들이었던 아서 2세(맥아더의 아버지)는 1863년 18세 되던 해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자원병으로 입대하여 위스콘신 자원보병단 소속 장교로 참전했다. 전쟁 중 부상을 당한 이 젊은 지원병은 제대한 뒤에는 아버지(맥아더의 할아버지, 아서) 밑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그러나 몇 달 후 법률 공부를 포기한 아서 2세는 1866년 재입대하여 정규군 17연대 소위로 임관하고, 곧 남북전쟁 공로로 중위로 진급한 뒤 주로 서부에서 인디언 전쟁에 참여하여 인디언들을 학살했다고 한다. 아서 2세가 참여한 주요 인디언 전투는 다음과 같다.
•1866, 9-1884: 펜실베니아, 뉴욕, 유타, 루이지애나, 아칸사에서의 전쟁 •1884-1885: 뉴멕시코 주 셀던 요새 지휘관, 제로니모(Geronimo) 정복 전투에 참가
어린 시절의 더글러스는 아버지로부터 남북전쟁, 인디오와의 전투 등에서의 영웅적인 전투담을 들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아버지의 영웅담은 어린 더글러스의 가슴속에서도 점점 부풀려졌을 것이다. 이무렵 맥아더의 나이는 여섯 살이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맥아더는 일찍부터 군인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열세 살 되던 무렵 텍사스 주 샌앤토니오에 있는 군사학교에 들어가 1897년에 졸업했다. 그리고 1899년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고, 1903년 6월에 졸업, 소위로 임관된 더글러스는 첫 임지로 필리핀을 선택했다. 맥아더의 이력을 쫓다보면 아버지의 흔적과 겹치는 것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필리핀 총독을 지낸 아버지 맥아더와 미국의 필리핀 지배의 중요성을 역설한 바 있는 아들 맥아더의 교차점이다.
아서 맥아더가 필리핀 총독을 한 시기는 1900년 5월 5일부터 1901년 7월 4일까지다. 그 이전 1898년 6월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하자 지원병 임시 준장으로 진급하여 마닐라 포위 작전에 미8군 2사단장으로 마닐라전투(1899), 말로로스 전투, 북부 공세 등을 지휘했고, 필리핀 독립군과 어린이들과 여자를 포함한 약 100만 명을 학살하는데 주역이 되었다.
이러한 공로로 1900년 1월에는 정규군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고 뒤이어 오티스(Elwell S. Otis, 1898-1900) 장군 후임으로 필리핀의 군인 총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임명자는 맥킨리 대통령이다. 1901년 7월 4일 민간인 총독 태프트(Taft)와의 갈등으로 군인 총독직을 사임하나 사령관직은 유지한다. 그 후 필리핀 독립군 지휘자 에밀리오 아귀날도를 체포해 전투를 중지케 하고 미국에 충성하도록 굴복시키는 공로를 휜스통 장군과 나누어 가진다.
1902년에 소장 그리고 이듬해 중장으로 진급한 아서 맥아더는 태평양 담당 사령관이 되는데, 이 기간 중 미군은 필리핀 독립군과 민간인을 포함하여 최소 60만 명에서 최대 100만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아들 맥아더가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공병 소위로 임관하여 필리핀에 파견된 때는 아버지 맥아더가 필리핀 주둔 미군 총사령관 재직 중이던 1903년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필리핀에서 2년간을 함께 근무했다. 아서 맥아더는 1906년 귀국하여 참모총장으로 근무하다가 1912년 67세로 작고했다.
맥아더 부자는 미국 독점자본주의가 제국주의를 노골적으로 표방하며,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필리핀 침략전쟁에 주요한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미제국의 선봉을 담당했던 더글러스 맥아더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알아보기로 하자.
맥아더에 따라 붙는 수식어들
맥아더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함으로써 한국과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반세기 동안 크고 깊은 영향력을 끼쳤던 인물이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8년,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준장으로 진급했고, 1925년에는 당시 가장 젊은 나이로 소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930년에는 미군 역사상 최연소 육군참모총장으로 전격 발탁되었다. 1935년 말 참모총장의 임기를 마치게 되었을 때, 역대 육군참모총장 중 가장 젊었고 가장 오랜 기간을 재임하는 기록을 세운 젊은 영웅이었다.
하지만 그는 갑자기 전역을 결심하게 된다. 필리핀 육군창설 임무로 인해 1935년 말 필리핀에 도착하고 난 뒤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군사고문관의 직책을 수행하던 중이던 맥아더는 1937년 12월 31일, 34년간의 군 생활을 마감했다.
맥아더는 1903년 웨스트포인트 수석 졸업을 시작으로 유난히 최초, 최연소, 최고 등의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군 생활을 영위했다. 물론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은 화려한 시절이었다. 미국의 언론들은 그를 최고의 군인으로 인식시키는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고, 대중들은 전쟁의 영웅으로 그를 대접하였다. 전형적인 ‘영웅 만들기’였다.
맥아더 영웅 만들기
1941년 7월 7일, 미 정부와 의회는 아시아 전문가이자 언론과 대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맥아더를 현역으로 복귀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동아시아 사령관의 직책이자 계급은 육군 중장이었다. 현역을 떠난 지 채 4년이 되지 않은 1941년 7월 31일 맥아더는 일선으로 다시 복귀했다.
기묘한 것은 비슷한 과오에 대한 정부와 언론의 이중 잣대였다. 일본은 진주만 폭격 다음 날인 12월 8일에 필리핀을 공습했고 맥아더 휘하의 미군과 필리핀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하와이의 피해복구에 6개월이 소요된 반면 필리핀의 경우에는 1년 이상이 소요되었다.
진주만의 허스밴드 킴멜(Husband E. Kimmel) 해군제독과 월터쇼트(Walter C. Short) 육군중장은 청문회에 회부되어 책임을 져야만 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그의 명성에 어떠한 오점도 남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육군성은 12월 초, 오히려 맥아더를 대장으로 진급시켰다.
그 후 맥아더가 필리핀을 떠날 때 까지 언론들은 미국의 투사이자 영웅으로 묘사했으며 필리핀인들 역시 그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다. 맥아더에 대한 호의와 편애는 그가 호주로 도망친 이후에도 계속된다. 필리핀의 마지막 저지선인 코레히도르 지역에서 외롭게 싸우던 미군은 결국 일본군에게 투항했다. 그 이전 3월 11일, 맥아더는 일부 참모와 함께 보트를 이용하여 이미 호주로 탈출한 상태였다.
이때도 맥아더에 대한 비판은 존재하지 않았다.「워싱턴포스트」지는 “그로 인해 미국, 영국, 호주의 군대 사기가 올라갔다.”고 맥아더의 호주 도착을 보도했으며, 맥아더는 서남태평양 사령관이란 직책으로 영전되었다. 이러한 모순된 상황이 계속되었던 것은 미 정부의 언론 통제 탓도 있었겠지만 전쟁 영웅이 절실했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은듯하다.
아버지의 기도
맥아더의 전과(戰果)에 관계없이 미국 내에서 그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뉴욕 인근 도시 바타비아에서는 기존의 야구장, 테니스장과 인근 공원을 포함하여 ‘맥아더 스타디움’으로 부를 것을 결정하여 맥아더에 대한 경의를 표시했고, 그의 고향 리틀록에선 맥아더의 이름을 딴 공원이 생겼다.
그리고 1942년 뉴욕 원에학회는 새롭게 선보인 골든-옐로우 수선화에 ‘.더글러스 맥아더‘라는 이름을 붙였다. 게다가 ’맥아더 글라이드‘라는 춤 이름이 생겼으며, 도시 여기저기에 맥아더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맥아더 우상화의 절정은 적십자사의 모금행사이다. 뉴욕시의 적십자 지부는 자신들의 할당액 중 약 100만 달러가 부족하자 ’더글러스 맥아더 주간‘을 만들어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 외 클리블랜드에선 폭격기 구매를 위한 자선권투대회를 열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여러 단체들도 맥아더를 가만 두지 않았다. 시카고 유니온 클럽, 뉴욕 남부협회, 태머니 협회, 테네시 협회 등의 단체가 맥아더를 명예회원으로 선출했다. 특히 ‘아버지의 날 위원회((National Father's Day Committee)는 1942년 최고의 아버지로 맥아더를 선정하기도 했다.
아마 아래에 소개하는 ’아버지의 기도‘라는 기도문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맥아더의 기도문, ‘아버지의 기도’는 링컨의 ‘백악관에서의 기도’와 함께 지금도 수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애송되고 있는 기도문이다. 아버지의 기도
엄격하지만 따뜻한 아버지로서의 맥아더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맥아더가 자신의 자식에게 이러한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특히 기도문 중 “패자를 긍휼히 여기며, 남을 정복하려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자녀를 바란다는 구절은 그의 이력을 알고 있는 사람에겐 차라리 어리둥절함을 느끼게 할 뿐이다.
맥아더는 수많은 단체로부터 메달과 훈장을 받았으며 위시콘신 대학과 하와이 대학 등은 그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주기도 했다. 맥아더의 인기는 미국 내에 머무르지 않았다.
한참 전쟁 중인 필리핀에선 그를 필리핀의 구세주로 묘사했으며 ‘아메리칸 시저’로도 불렀던 모양이다. 문제는 맥아더에 대한 이러한 열광이 태평양 전쟁의 초기였고 그 무렵의 맥아더는 연일 고전을 면치 못하는 중이었으며 급기야 위기에 처한 부하들을 내 버리고 호주로 도망치기 전에, 일어난 사건들이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미 정부와 언론은 맥아더의 실체에 대하여 모두들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한국전쟁과 맥아더의 부활 그리고 몰락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고, 맥아더는 연합군최고사령관으로서 극동국제군사재판(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the Far East, IMTFE,)을 주관하는 신분이 된다. 맥아더의 인기는 여전했다. 1945년 미국 내에서 실시된 가장 존경하는 인물 여론조사에서 프랭클린 루즈벨트, 링컨, 예수, 조지 워싱턴 등에 이어 5위를 차지한 바 있다.특히 1944년과 48년에는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공화당의 예비후보로 거론되었으며, 실제 1948년의 선거에는 공화당 예비선거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맥아더의 한계는 전쟁의 영웅이었지 정치적 영웅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1947년 10월 5일「워싱턴 포스트」지는 갤럽의 여론조사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그 기관(갤럽)에 의해 실시된 정치적 예선경주(trial heat)에서 더글러스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의 뒤를 달렸다. 조사는 미국인들이 맥아더 원수를 정치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을 보여줬다. 하지만 맥아더는 그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바라는 전폭적인 지지자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트루먼과 맥아더 간의 예선 경주의 결과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항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첫째, 이러한 사항을 지적하기 전에, 맥아더 원수는 이 시기 정치적 무대에서 고려될 수 없다. 이러한 주제에 대한 그의 최근 발언은 그의 별 다섯 개 달린 모자를 정치의 장으로 옮길 어떤 의도도 완전히 없다는 것이다.
둘째, 맥아더는 거의 10년 간 미국 본토에 없었고 다른 장군들처럼 고향으로 ‘승리의 귀환’을 하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한 계획을 갖고 그가 내년 봄에 돌아왔을 때 아직 공표되지 않은 후보인 그에 대한 지지는 쉽게 힘을 얻을 것이다.
셋째, 맥아더의 나이는 백악관 후보로서 그의 인기를 반감시켰을 것이다. 그는 내년 1월이면 68세가 된다.
넷째, 트루먼 대통령의 적수들이 가진 궁극적인 힘을 평가하긴 여전히 매우 이르다.”
맥아더는 그의 한계를 알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정치에 대한 야욕을 들어내었고 결국 실패했다. 맥아더는 두 번의 전쟁을 치르면서 언론과 대중이 만들어내었던 전쟁영웅이었지 정치 영웅은 아니었다. 공화당 경선을 끝으로 언론은 그를 외면하기 시작했고 대중은 서서히 그를 잊어갔다.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영웅 맥아더는 1950년 한국전쟁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계기로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전쟁 초기 맥아더의 대응 전략은 대부분 실패했다. 북한군의 지연을 위해 제일 먼저 급파한 미24사단은 무참하게 패배했고, 유엔군과 한국군은 한반도의 남동쪽 끝까지 밀렸다.
그러나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맥아더의 모든 실패담을 덮어주었다. 여기서 맥아더의 정치적 야욕이 그를 재차 몰락의 길로 이끌게 된다.
당초 유엔군 내에서는 10월까지 북으로 진격을 실시하면 그 해(1950년)안에 전쟁이 끝나리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중공군이 참전을 하였고10월 첫 교전을 시작으로 유엔군은 다시 남쪽으로 철수해야만 했다. 전쟁 초기와 달리 이번 철수는 중공군의 참전 문제와 더불어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만 할 사안이었다.
정치 문제가 아닌 전쟁에 관한 쟁점으로 맥아더를 비판하는 논조가 최초로 나타난 것이 바로 이 무렵부터였다. 1950년 12월 15일,「워싱턴포스트」지는 ‘맥아더의 전역’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맥아더가 매우 고참이라는 사실이 워싱턴과 도쿄 사이의 관계를 복잡하게 만들었다.…원수의 계급은 자신이 전역을 선택하지 않으면 계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그가 다음해에 퇴임하길 원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런 일이 생기리라 믿지 않는다.”이제 맥아더의 퇴임을 바라고 있다는 뉘앙스의 논조이다. 이 기사가 시작이었다.
한국전쟁 관련뿐 아니라 맥아더가 추진했던 일본의 노동조건에 대해서도 메스를 가했고, 1950년 8월, 맥아더가 해외참전 향군회에 보낸 연설문도 도마 위에 올랐다. 특히 맥아더가 이 연설문에서 대만에 대한 미 행정부의 정책을 비난하자 정부 역시 가만있지 않았다. 백악관은 발언의 취소와 재발방지를 엄중 경고했다.「뉴욕 타임스」는 1951년 3월 28일부터 30일까지 3일 동안 “맥아더 1·2·3(MacArthurⅠ·Ⅱ·Ⅲ)”이란 기사를 통하여 맹폭을 가했다. 맥아더의 정치적 발언, 그의 측근 구성의 문제, 통제할 수 없는 맥아더, 무리한 북진과 중공군 개입, 그리고 그의 부대 통제 실패 등이 주요내용이다.
1951년 4월에 들어서자 맥아더에 대한 비난의 열기는 최고조로 달했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3월 말 중공에 제안한 휴전협상에 관한 건이었다.
맥아더는 “중공은 전쟁에서의 승리 희망이 없고 만약 유엔이 공격적으로 전쟁 전략을 수정하면 북경정부는 위험할 것”이라는 정부의 의도와 전혀 다른 도발적 경고 발언을 했다. 말이 협상이지 전쟁을 확대하겠다는 완전한 협박이었다. 물론 중공은 맥아더의 도발적 발언에 대해 고려할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기고 휴전에 응하지 않았다. 정부와 협의 없이 발표된 그의 발언은 미국과 중공의 관계 뿐 아니라 자신과 미국 정부 사이의 간극을 더 깊게 만들었다.
행정부에 대한 맥아더의 도전은 1951년 4월 5일 조지프 마틴(Joseph W.Martin) 공화당 의원이 맥아더가 3월 19일 그에게 보낸 편지를 공개하자 절정을 이루었다. 그 내용은 “장제스(蔣介石, 1887-1975) 군대를 이용해 중국과 제2전선을 구축할 것”과 “아시아가 공산진영에 패배한다면 유럽의 몰락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한국전쟁을 바로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대시키겠다는 의미다.
맥아더의 해임
트루먼은 맥아더의 해임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하지만 일부 맥아더 추종자들 특히 공화당의 거센 반발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트루먼은 1951년 4월 11일 세간의 예상과 달리 맥아더를 해임하고 후임으로 매튜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장군을 후임으로 선정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맥아더 해임관련 문서를 아래에 소개한다.
트루먼은 기자회견애서 맥아더가 공식적인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미국과 유엔의 정책을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는 배경을 설명하며, 자신이 행한 맥아더 해임 결정의 정당성을 위해 민간에 의한 군의 통치(문민우위, Civilian Control of the Military)라는 미국의 헌법적 전통에서 찾는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거대한 역풍
아이러니 한 것은 맥아더의 해임이 다시 한 번 더 그를 살려냈다는 점이다. 우선 공화당은 대통령 탄핵 결의안과 맥아더를 의회로 불러 그의 의견을 듣자는 결의안을 상정했다. 물론 이 결의안은 민주당 출신 상원의장에 의해 부결되었지만 그 후폭풍은 만만치 않았다. 민주당과 공화당에서 분리된 진보당은 평화를 내세우며 트루먼을 지지했고 공화당은 공산당의 위협을 들먹이며 맥아더를 옹호했다.
각 주 의회와 시 역시 이 분열에 동참하여 정국은 극도의 혼란 상태가 되었다. 정치권과 마찬가지로 대중들도 이러한 분열에 동참하였으나, 의외로 대부분의 대중들은 맥아더에 동정표를 던졌다. “보스턴에서 맥아더 해임에 대한 격렬했던 반응이 이제는 진정되어 가지만 여전히 거리에 맥아더를 영웅으로 지지하는 모습이 지배적이다”라는뉴욕 타임스의 기사가 이를 대변해 준다.
해임 발표 다음날 오후까지 백악관에 도착한 편지, 전신, 전화에 대한 분석을 살펴보면, 맥아더 지지의 편지가 5,986통, 전신이 42,024통, 전화가 1,776통이었음에 비해 트루먼 지지의 편지는 32통, 전신이 334통 그리고 전화가 13통에 불과했다.이외에도 시민들은 거리 시위와 트루먼을 형성화한 인형을 교수형에 처하는 등의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맥아더를 지지하고 트루먼을 비난했다.
트루먼을 지지하는 대중들은 소수에 불과했고 “훗날 역사가 이번 결정이 옳았음을 증명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시민 역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각 단체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재향군인회, 미국 애국여성동지회 등이 맥아더 지지 결의안을 의결했고, 심지어 뉴욕 인근의 항만 노동자들도 트루먼 항의 집회를 했다.
그 외에도 아일랜드계 미국인 민병들의 모임이라는 단체가 맥아더의 정책에 지속적인 반대를 표출했던 영국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피켓시위를 벌렸고, 국제기독교협의회는 맥아더 지지의 전보를 도쿄로 보내기도 했다.
물론 모든 단체가 맥아더를 지지한 것은 아니다. 미국재향군인위원회와 미국좌익여성회 그리고 전국해운노조와 산업별 노동조합회의는 트루먼을 지지했지만 여론의 방향을 바꾸기에는 너무나 미미한 세력이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이러한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맥아더는 14년 만에 귀국을 했다. 1951년 4월 6일 그의 귀국길에는 일본 천황을 비롯하여 수많은 일본인들이 환송했고, 하와이의 엄청난 환영을 뒤로 하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는 30여 만 명의 환영객들이 운집했다. 그리고 다음 경유지인 워싱턴의 환영열기를 온 몸에 만끽하여 1951년 4월 18일 12시 30분 의회에서 그 유명한 고별 연설을 했다.
맥아더는 의회에서 마지막 인사 후에도 뉴욕, 시카고 등지에서 수백만의 환영인사들을 몰고 다니는 열풍을 일으켰다. 이때까지만 해도 맥아더 신드롬은 전쟁 영웅을 뛰어 넘어 정치영웅 혹은 투사로서의 양면성을 가진 인물로서 사람들에게 기억될 것만 같았다.
비참한 몰락
이쯤에서 멈추어야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다시 정치에 욕심을 내었고, 이는 1951년 4월 19일 의회에서 어떠한 정치적인 행동도 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작별인사와 상반되었다. 대중의 반응은 급격히 냉랭해졌다.
1952년 7월 공화당 후보 예비기조 연설에서 그는 대실패를 했고 1년 4개월 전, 해임 초기의 뜨거웠던 열기는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맥아더의 연설은 미국 통합을 위한 후보 선택을 촉구하고 현 정부의 정책을 비난하는 식상한 내용으로 형편없었고, 큰 영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는 더 이상 선거의 다크호스가 아니었으며, 지지자들도 그를 떠났다. 결국 분위기를 감지한 맥아더는 기조연설이 끝나자 바로 자리를 떠 황급히 뉴욕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후 그는 한동안 정치적 중앙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결국 공화당은 아이젠하워를 선택했고 그는 미국의 제34대 대통령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에 부딪히게 된다. 아이젠하워 역시 맥아더와 마찬가지로 전쟁영웅이었다. 전쟁영웅으로서의 맥아더에 그렇게 환호했지만 정치가 맥아더는 단연코 거부했던 미국인들이 아이젠하워에게는 왜 다른 잣대를 대었을까?
사무엘 헌팅턴(Samuel P. Huntington)은 ‘군과 국가(The Soldier and The State)’에서 아이젠하워보다 훨씬 이전부터 군인 영웅으로 평가된 맥아더가 정치적 성공을 거두지 못한 이유로 둘의 극명한 성격적인 차이를 들었다.
헌팅턴은 맥아더를 자신의 가치와 행동을 옛날의 귀족주의적 유산에 바탕을 둔 문관 당국에 복종하기 힘든 오만하고 냉철한 장교로 분류했다. 반면, 아이젠하워를 민주적이며 문관인 상관들과 쉽게 협력하는 친절하고 서민적이며 태평스러운 군인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했다.
즉, 맥아더는 카리스마적이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불굴의 정치지도자 유형이고 아이젠하워는 융통성 있고 실제적이며 허세를 부리지 않는 정치지도자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후자와 같은 인물을 원했다.
맥아더는 유세 기간 내내 군복을 입고 다녔다. 이러한 맥아더의 모습에서 대중들은 군복을 입고 대중을 통치하는 대통령의 모습 즉 끔찍한 군부독재를 상상하며 맥아더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결국 세 번에 걸친 맥아더의 정치 실험은 비참하게 종료되었다.
마지막 부활
정치 진입에 실패한 맥아더는 이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기업가로 변신하여 나머지 삶을 영위했다. 그가 레밍턴 랜드의 회장으로 취임하여 군납 건 등에서 모종의 음성 거래를 했다는 루머 등은 생략한다.
물론 그가 정치권에서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군 시절 그의 부하였고 아직 맥아더를 추종하는 무리들도 다수 있었다. 그러나 그 영향력은 극히 미미했다.
그러다가 1960년 대 들어서서 맥아더는 한 번 더 부활한다. 그 계기는 반공을 명분으로 남부 베트남에 개입하기 시작하고부터다. 물론 이번에도 정치색을 배제한 군인으로서의 맥아더였다.
맥아더 살리기는 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웨스트포인트는 1962년 5월 12일, 맥아더에게 ‘국가에 대한 뛰어난 봉사’의 이유로 실바너스 테이어 상(Sylvanus Thayer Award)을 수여했다. 수상식에서 맥아더는 ‘의무, 명예, 조국’이라는 제목의 연설로 생도들과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명연설을 했다.
통킹 만에 떠도는 전운(戰雲)과 함께 맥아더는 부활했다. 정치가 맥아더가 아닌 군인 맥아더의 재평가가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한때, 미국의 정치계를 혼란시켰던 이미지는 제거되고 공산주의를 박멸시켜야한다는 반공투사 맥아더의 모습이 미국은 필요했단 것이다. 하지만 맥아더는 더 이상의 수명을 누리지 못하고 1964년 4월 5일 84세로 일기를 다하고 만다.
맥아더는 분명히 유명을 달리했다. 그러나 전신(戰神)으로서 맥아더는 월남전, 중동전 등 미국이 전쟁을 수행할 때마다 부활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리라 본다. 미국과 달리 한국에서 맥아더는 늘 신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철저한 오해 때문이었다는 것을 이제 한국인들도 알 시점이 되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다루지 않았던 더글러스 맥아더의 경력의 일부를 통해서 그가 얼마나 철저한 제국주의자였는가를 확인해 보기로 하겠다.
더글러스 맥아더의 제국주의적 언행
첫째, 참전 군인들에 대한 잔인한 진압
1932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 군인들과 가족 약 2만 명이, 1920년 제정된 상여금법에 명시되었으나 지급되지 않은 보상을 요구하며 수도 워싱턴에 모여 천막 농성을 하고 있었다. 맥아더 참모총장은 이들을 부관 아이젠 하우어 소령의 반대와 후버대통령의 명령도 무시하고, 패튼 소령이 이끄는 6대의 전투용 탱크와 1개 보병 대대 500명과 500명의 기마병 그리고 800명의 경찰을 동원, 잔인하게 진압했다.
맥아더 자신의 전우이거나 부하였을 이들의 맨주먹의 처절한 호소를, 퇴역군인들의 아들이나 동생뻘 되는 이들을 동원하여 마치 적군을 대하듯 대검을 총에 꽂고 지휘관들은 긴 칼을 휘두르면서 돌진하여 4명을 죽이고 1,017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경찰도 최소 69명이 부상당했다. 이것이 목숨을 걸고 참전한 군인들에 대한 맥아더의 태도다.
둘째, 근무태만 그리고 작전 실패와 인종편견주의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했다는 통보를 받고도 제대로 대책을 세우지 못해 공군과 해군 기지가 일본군의 공격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바탄과 코레기도(Bataan and Corregidor)로 퇴각하고도 제대로 지휘를 하지 못하여 일본군에 패배했다. 그리고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호주 멜본으로 피신했다.
호주로 후퇴 중인 1944년, 백인우월주의자(white supremacist)이며 인종차별주의자(racist, bigot)인 그는 1944년 3월 16일 파푸아 뉴기니에서 발생한 백인 간호원(장교인지 사병인지 불)을 강간한 혐의로 흑인 사병 6명을 교수형에 처했다.
이 일은 1899-1902년의 필리핀-미국전쟁 때 제국주의자이며 인종차별주의자인 그의 아버지와 부하들이 필리핀 독립군과 주민들을 죽이면서 “검둥이 죽이는 사업(nigger killling business)”이라고 불렀다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이로 인해 참전 흑인병사들의 분노는 물론 세계적인 비난을 받았다. 이와 같이 맥아더는 대를 이어가면서 인종차별주의와 제국주의 침략의 선봉에 서왔다.
셋째, 미 제국 최악의 죄악 원자폭탄 투하 명령 기획
미국은 인류 역사상 최초이며 유일무이하게 원자폭탄을 사용한 국가다. 이 죄악상은 전쟁범죄로 거론되었으나 맥아더의 방해로 흐지부지되었다. 왜냐하면 그 역시 원폭투하에 대한 나름의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맥아더는 한국전쟁 이전부터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그는 종종 공산주의자 특히 중국 공산당들을 세균과 동일시하여 씨를 말려야 한다고 주장하곤 했다.
김명철이 저술한『한의 핵전략』이란 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있다. “8월이 되자, 북한 인민군은 부산 교두보까지 밀어붙였다. 딘 소장은 휴전이 될 때까지 북한에서 포로생활을 해야 했다. 딘 소장은 대전에서 본 북한군의 포격은 유럽 전선에서 본 것과 같은 정도의 치열한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미군의 제1차 핵사용 계획은 이때 나왔다.
한미연합군이 한국의 한쪽 구석인 부산 교두보까지 밀리고 등 뒤로는 바다 밖에 없게 되었을 때 핵사용이 검토된 것이다. 미국의 전략공군부대는 부산 교두보를 포위한 북한 인민군에 원폭을 투하할 계획을 갖추었다. 당시 전략본부공군부사령관 토마스 파워 장군은 ‘나는 원폭 투하를 위해서 전략공군부대를 대기시키라고 하는 명령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바로 위와 같은 계획을 세웠던 인물이 바로 맥아더다. 맥아더는 한국전쟁에서 24개 내지 30개 정도의 원자폭탄을 북한과 중국 등 목표지점에 투하 할 것을 요청했고, 방사능이 우라늄의 320배나 되는 코발트탄의 사용도 요청했다. 또 무시무시한 네이팜탄을 60만 톤을 사용했다.
당시 북한 인구를 2천만 명이라고 할 때 1명 당 30 킬로그램이라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이와 같이 미국의 정책과 전술은 해당 국민의 생명이나 생존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중공군 참전 이후 맥아더가 원폭 투하를 추진했고 트루먼이 만류하는 와중에 맥아더를 해임했다는 것이 최근 학계의 주류 내용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국전쟁 초창기부터 핵을 사용하려는 계획이 있었다는 문서가 발견되어 이 부분은 좀 더 연구가 되어야할 듯싶다.
분명한 것은 한국전쟁 중 원자폭탄 투하 계획이 있었고 맥아더가 그 계획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트루먼 역시 맥아더 못지않은 호전적 인물이었음을 고려하면 어떻게 하여 한반도가 피폭을 면하게 되었을까하는 점이다.
여기에는 소련의 핵보유 능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1949년 최초의 원폭 실험이 성공한 이후 소련은 1950년 5기, 1951년 25기, 1952년 50기, 1953년 120기 정도의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물론 미국은 그 무렵 수소폭탄을 성공시켰고 핵탄두도 1,000기 이상의 절대적 우위에 있었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할 때처럼 유일한 핵보유국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만약 맥아더의 소신대로 한반도와 만주에 원폭이 피폭되었다면 우리 민족은 어떻게 되었을까? 적어도 백년 이상 '생태학적 진공지대'가 될 운명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정말 섬뜩하지 않은가?
넷째, 극동국제군사재판과 제국주의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아시아의 수많은 나라를 침략하여 엄청난 수의 사람을 학살하고 약탈한 죄악을 묻기 위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이 일을 주관한 사람이 맥아더다.
1946년 5월 3일,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 극동국제군사재판(極東國際軍事裁判,: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the Far East, IMTFE)을 설치하고 운영할 때 제국주의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그는 전범 1호 일본 왕을 제외하고, 그 대가로 실제적인 일본 주재 미국 총독으로 군림했다. 검찰과 판사의 구성을 식민지 소유국과 식민지 두 곳만을 포함하고 피해국들은 철저히 배제하여 제국주의적 발상을 극대화했다. 검사와 판사의 구성 11개국은 다음과 같다.
① 미국(식민지: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괌, 미국령 사모아, 미드웨이 섬, 북마리아제도, 버진아일랜드, 웨이커 제도 등) ② 영국(식민지: 인도, 버마, 말레이지아, 싱가포르, 버뮤다, 케이만제도, 포클랜드제도, 지브랄타, 세인트 헬레나섬 등) ③ 캐나다 ④ 호주(식민지: 뉴기니아) ⑤ 뉴질랜드(식민지: 토켈라우, 로스, 쿡제도, 니우에 ) ⑥ 네덜란드(식민지: 동인도회사인 인도네시아) ⑦ 프랑스(식민지: 동인도회사인 인도차이나: 월남, 라오스, 캄보디아) ⑧ 중국 ⑨ 소련(우크라이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밸라루스 등) ⑩ 필리핀(당시 미국의 식민지) ⑪ 인도(당시 영국의 식민지)
여기서도 그의 제국주의적인 행태가 명백하게 나타난다. 피해국들을 철저히 배제함으로써 공정한 재판과 합당한 보상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런 의도는 영국과 미국은 물론 월남,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식민지로 갖고 있던 프랑스가 다시 식민지를 다시 차지하려 돌아와 이들 나라의 독립군과 전쟁을 했다. 검사와 판사로 참가한 네덜란드도 식민지 인도네시아에 되돌아와 인도네시아독립군과 전쟁을 일으켰다.
극동국제군사재판은 우리나라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분단되어야 마땅하나 맥아더와 미제국의 농간으로 피해국인 우리나라가 분단되었으며, 독도가 계속 문제가 되고 있는 것도 극동국제군사재판과 무관하지 않다. 더욱이 피해자인 우리나라를 가해국인 일본과 동일시함으로써 일제에 의한 자원수탈, 문화재약탈, 징병, 징용, 위안부 등을 포함한 배상문제가 완전히 무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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