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북한이 세계보건기구(WHO) 집행이사국에 선출된 것과 관련해 지난 6월 2일, 트럼프가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 이를 두고 축하받은 나라에서는 말이 없고 축하를 보낸 나라인 미국 내에서는 볼썽사나운 시비질이 벌어지고 있다. 공화당 대선주자 대부분이 트럼프의 축하 메시지를 싸잡아 비난 성토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트럼프 측 인사는 그의 재임 기간 전쟁이 없었고 평화가 잘 유지됐다며 트럼프를 옹호하기에 바쁘다.
미국이 밖에서는 북한 비핵화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북한이 핵을 버리지도 가지지도 못하게 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닐 것 같다. 북한이 ‘동네북’이 돼서 필요하면 언제든지 두들겨 패서 악역을 계속하도록 하자는 것이 미국의 전통적 고약한 본심이라고 보여서다. 미국은 매번 핵 담판 최종 단계에 가서 판을 깨는 못된 버릇이 있다. 미국의 최대 관심사는 핵 타결이 아니라 오로지 핵을 가진 북한의 악역이다. 그래야 남한을 영구적 호구(봉)로 틀어쥐고 외교, 안보, 경제 등 온갖 이권을 챙길 수 있어서다.
그런데 느닷없이 최근 트럼프가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축하문을 보내서 미 조야가 갑론을박하고 있다. 지금 트럼프는 두 번째 법적 문제에 걸려들어 코가 닷 자나 빠져 제정신이 아닐 것으로 짐작된다. 남은 인생을 좌우할 최대 위기에 직면한 가운데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챙긴 것은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다고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쏟아진 비판을 요약 압축하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친하다는 걸 과시해 주목을 받자는 것 ▲청개구리 심사 때문에 하라는 짓은 않고 하지 말라는 걸 한다 ▲미친 짓을 해서 시선을 끌자는 수작이다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보도된 바는 없지만 트럼프 지지 세력은 대부분 비판 보다 지지 쪽에 가까울 거라는 건 상식이다. 국내외 우리 동포 중 일부 진보적 인사들도 트럼프를 지지하고 차기 대선에서 당선되기를 희망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대부분 우리 동포의 트럼프 지지 배경을 보면 트럼프가 기존 정치가들과 차별화되는 언행을 한다는 것과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공동합의문’(2018)에 매혹 감동돼서라 볼 수 있다. 바꿔 말하면, 트럼프의 단면만 보고 지지로 돌아선 것이지 총체적 평가를 통해 내린 결정이라고 보긴 어렵다.
이번 트럼프의 축하 메시지는 대선을 의식한 선거전략의 일환이라고 봐야 한다는 게 나의 주장이다. 멀지 않아 시작될 대선 유세에서 트럼프는 미국의 안보를 최대 위기로 몰아가고 있을 뿐 아니라 전쟁으로 전 세계에 고통을 안긴 사람이 바로 바이든이라고 맹공을 퍼부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재임 기간 중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관계가 좋았기 때문에 미국의 안보 위기도 없었고 한반도에 전쟁 위기도 없었다고 자랑할 것이다. 이어서 자기가 당선되면 북미 관계 개선으로 미국의 안보를 지켜내고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다고 큰소리칠 게 뻔하다. 또, 우크라이나 미러 대리전을 끝낼 수 있다는 말도 빼놓지 않고 할 걸로 보인다.
여기서 트럼프의 대북 관련 행각을 한 번 살펴보자. 북한을 향해 입에 거품을 물고 “화염과 분노”라며 최대의 적개심을 표출하던 그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핵무력 완성, 힘의 균형 선언’(2017)에 기겁하고 태도가 돌변해 북미대화에 나섰다. 난관을 헤치고 어렵사리 역사적 ‘싱가포르 합의’라는 공든 탑을 쌓았다. 이 선언 자체는 매우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라 흠잡을 데가 없다. 더구나 판문점선언 지지까지 내포돼서 우리 동포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던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북한은 미국의 리비아식 선 비핵화 주장을 비범한 외교술로 잘 녹여내고 천신만고 끝에 이 역사적 선언을 도출해 내는 데 성공했다. 물론 문 대통령의 측면 지원이 크게 기여했다는 것도 평가돼야 마땅하다.
그런데 웬걸, 1차 회담 직후부터 미국의 태도가 도무지 심상치 않았다. 2차 북미정상회담 개최에 난관을 조성하면서 뜸을 들였다. 끝내 8개월 만에 2차 회담(2019.2.28.)이 베트남 하노이에서 개최됐다. 이 회담을 위해 특별히 남·북·미 실무진이 스웨덴에서 머리를 맞대고 선언문 초안을 완벽하게 만들어 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밀려났던 존 볼턴 안보보좌관이 하노이에 나타났다. 누구나 불길한 징조를 예감했다. 미국 대표단이 들고 온 보따리 속에는 판을 깨자는 연극 각본이 들어있었다. 볼턴이 노란 봉투를 내밀고 사찰 범위 확대와 선 비핵화를 외쳤다. 트럼프는 ‘용감하고 결단력 있게’ 회담장을 박차고 귀국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는 기막힌 ‘버라이어티 쇼’를 완벽하게 해냈다.
북한은 영변 핵시설 영구 불능까지 제시하며 서명을 유도했다. 그러나 판을 엎어버리기로 작심하고 나타난 트럼프는 끝내 만날 기약도, 작별 인사도 없이 훌쩍 떠나고 말았다. 그래서 ‘싱가포르 합의’는 애초부터 재선을 노린 연극이었다는 주장에 무게가 실린다. 물론 연극을 꾸몄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사례는 차고 넘친다. ‘평양선언’(2018.9.19.)으로 남북한이 급속 밀착하자 기절초풍한 트럼프는 스티븐 비건 미 대북 정책 특별대표를 서울에 급파했다. 비건은 일제 총독부라고 불리는 한미실무단(한미워킹그룹)을 급조하고 남북 교류 협력을 물샐틈없이 틀어막았다.
더욱 가관인 건 미국 시민 방북 전면 금지령이다. 특히 미국 시민인 우리 동포 이산가족들에게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이들은 트럼프가 저주의 굿판을 벌였다며 지금도 격렬하게 분노하고 있다. 북한은 풍계리와 동창리 핵과 미사일 시험장을 파괴하고 핵미사일 발사 유예(모라토리엄)까지 선제적 조치로 해서 분위기 조성에 혼신을 다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단 하나의 대응 조치도 취하질 않았다. 그는 ‘종전선언’을 하겠다고 수도 없이 약속했건만 이것도 끝내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
하노이 회담 결렬과 동시에 북측은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영원히 없을 것”이라면서 ‘새로운 계산법’을 2019년 연말까지 내놓지 않으면 평양은 자신의 길을 가겠다고 최후통첩을 날렸다. 하지만 트럼프는 이를 외면했다. 조급한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미 세 정상 판문점 회동(2019.6.30.)을 성사했다. 거기서 트럼프가 분계선 넘어 북녘땅을 밟는 쇼도 벌였다. 그리고 3개월 후 스톡홀름에서 북미 실무진이 모였다. 미국은 ‘행동 대 행동’에 의한 선언 이행에는 입을 다물고 선 비핵화를 고집했고 ‘지연작전’을 쓴다고 판단한 북한 협상팀은 자리를 뜨고 말았다.
트럼프는 남한이 미국의 속국이라는 착각을 하고, 북한을 미국의 힘으로 제압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인다. 예를 들면, 2013 대선 출마를 저울질할 때 라스베이거스 호텔에 모인 자기 지지자들에게 트럼프가 “주한미군 주둔비 증액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라고 발언했다.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하면 한국은 3분 안에 무릎 꿇고 싹싹 빈다”라는 모멸적인 발언도 했다. 또, 2016년 동북부 대선 유세에서 “한국이 지불하는 주둔비는 푼돈에 불과하다”라고 떠벌리는가 하면 “주둔비 올려 받는 건 집세 받기보다 쉽다”라는 모욕적 발언도 했다. 그는 집권 내내 주둔비의 10배, 20배를 내라고 호통을 쳐댔다.
마크 에스퍼 미 국방부 장관은 트럼프가 미군 철수를 지시해 당황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물론 ‘쇼’로 밝혀졌다. 미군이 철수하면 한국인은 곧바로 죽는다는 인식이 트럼프의 뇌리에 깊이 박혀있다고 보인다. 동시에 그는 군산복합체와 운명을 같이 하는 미 의원들도 미군 철수는 그들의 명줄을 잘라내는 걸로 여길 것이라는 걸 익히 잘 알고 있다고 봐야 한다.
트럼프를 옳게 평가하려면 그의 대외정책 전반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는 5개 열강이 합의해 출발한 ‘이란 핵 합의(JCPOA)’를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또, 오바마의 역작인 미-쿠바 관계 정상화를 깨버렸다. 결론적으로 말해 그는 세계 평화나 번영에는 추호도 관심이 없는 광대에 불과하다고 해야 맞다.
그러니 주한미군 철수로 이어질 수 있는 ‘싱가포르 합의’를 트럼프가 이행하리라고 믿는 건 현실성이 거의 없다고 봐야 옳지 않을까 싶다. 이번 트럼프의 축하 메시지는 오로지 다가오는 대선을 의식한 사전 선거전략의 일환이라는 걸 재강조하고 싶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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