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8일에 있었던 뉴욕 컬럼비아대 학생들의 팔레스타인 연대 시위를 계기로 미국 전역의 대학가에서 반전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미국의 주류 언론, 정치권이 ‘반유대주의 폭동’, ‘테러 옹호세력’, ‘외부세력 개입’ 등을 운운하며 학생들을 향한 비난을 퍼붓고, 경찰이 캠퍼스에 진입해 학생들을 강제 연행하는 등 갖은 탄압을 벌이고 있지만 시위는 도리어 확산하는 중이다.
컬럼비아대 학생들의 농성 투쟁을 시작으로 다른 대학들에도 잇따라 농성장이 설치되었다. 중서부에 위치한 미시간대에서도 4월 23일부터 농성 투쟁이 시작되었는데, 미시간대는 1960년대 미국 학생운동의 대표 조직이었던 SDS(민주사회를 위한 학생모임)의 본거지였으며 1965년 미국 대학들 중 처음으로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가 일어난 곳이다.
팔-이 전쟁이 시작된 작년 10월부터 미국 대학가 곳곳에서 팔레스타인 연대 시위가 일어나자, 일각에서 베트남 전쟁 반전세대를 잇는 ‘제2의 반전세대’가 등장했다고 표현했는데 이번 시위를 거치면서 확언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의 흐름을 지켜봐야겠지만, 이번 미국 청년·학생들의 시위에서 우선 주목되는 지점 몇 가지가 있다.
1. 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청년·학생
첫 번째는 최근 몇 년 새 미국 청년·학생들의 정치의식 수준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미국의 청년·학생들이 근 10년 사이 대대적으로 참여한 시위의 내용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데, 2017년의 여성 인권(페미니즘) 시위, 2020년의 흑인 인권(BLM) 시위를 들 수 있다.
당시 이른바 ‘미투’를 기폭제로 기초적인 인권 문제에 목소리를 높이던 이들이, 3년 뒤에는 미국의 빈부격차 및 공권력 오남용 문제와 얽혀있는 인종차별 문제에 목소리를 내면서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모순을 지적하더니, 이제는 현대 미국을 지탱하고 있는 제국주의까지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는 미국 민중들이 1950~60년대 흑인 민권운동에 이어 1960~70년대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에 나선 지난날의 역사와도 유사하다. 하지만 당시의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전면 개입하고 있었고 청년·학생들은 징집 대상이 되어 직접적인 피해를 강요받고 있었으나, 현재 미국의 청년·학생들은 그렇지 않다.
또한 베트남 전쟁 당시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맞서 세계적으로 학생운동 물결이 일던 68혁명의 여파로 서방 청년·학생들 사이에 제3세계 문제에 대한 관심이 전반적으로 높았으며, 진보운동이 왕성하게 이루어지면서 정치적 대안까지 어느 정도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이를 보면 오늘날 미국의 청년·학생들이 이전보다 어려운 조건임에도 반전운동에 나섰음을 알 수 있다.
2. 미국의 쇠락기에 일어난 반전시위
1) 몰락하는 미국의 패권
두 번째는 이번 시위가 미국의 패권이 몰락하는 시점에 미국 내부에서 일어난 커다란 균열이라는 점이다. 이번 시위는 우연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세계질서가 미국 중심의 단극적 다극체제에서 다극체제로 이행되고 있음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2021년 미국은 탈레반과의 전쟁에서 패배했으며, 2022년부터 적극 개입 중인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패배하고 있다. *단극적 다극체제: 미국의 패권(단극)이 유지되는 가운데, 여러 강대국(다극)이 미국의 지위를 추격하는 국제질서. 러시아가 다시 부상하고 중국이 급속도로 미국을 추격하면서 세계질서가 재편된 200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
트럼프 정부 시절부터 시작된 중국과의 경제전쟁은 여전히 지리멸렬하게 이어지고 있으며, 러시아는 전쟁과 대대적인 제재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정치적 안정과 경제성장을 누리고 있다.
북한 또한 수십 년 동안 계속된 미국의 제재와 군사적 압박에도 국방력 강화와 경제발전을 달성하는 중이다.
중동의 대표적 반미국가로 분류되는 이란, 시리아도 미국의 계속되는 공세에도 불구하고 체제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 미국의 앞마당이라 불리는 중남미에서는 1990년대 말부터 2014년까지 있었던 일련의 진보정권 수립을 뜻하는 1차 핑크타이드를 잇는 2차 핑크타이드가 일면서 대미 자주를 외치는 진보정권들이 대대적으로 들어섰다.
국외 상황이 이렇게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는 가운데 미국의 내부 사정도 썩 좋지 않다. 경제는 호황인데 빈곤층은 늘어나는 심각한 빈부격차가 계속되고 있고, 물가와 부동산 가격이 치솟는 가운데, 마약 문제와 각종 절도 범죄가 미국 전역에서 끊이질 않고 있다. 이 같은 민생위기와 사회불안은 역대 최저치 출산율 기록으로 이어졌다.
뭐 하나 제대로 풀리는 것이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승산이 있어 보이는 이스라엘의 전쟁에 조바심을 갖고 전폭적인 지원을 했더니, 이스라엘이 대대적인 학살 만행을 벌이면서 미국의 대이스라엘 지원에 대한 도덕적 정당성이 완전히 깨져 버렸다.
2) 미국의 청년·학생들이 행동에 나선 이유
나의 삶에는 도움을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나라가, 남의 나라가 벌이는 끔찍한 학살에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지원하는 현실을 보며 미국의 청년·학생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번 미국 청년·학생들의 시위는 근본적으로 젊은이들의 단순한 정의감, 동정심이 아닌 미국의 제국주의와 그를 지탱해온 주류 정치인들이 만들어낸 실패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2010년대부터 미국 청년층 사이에서 (민주)사회주의에 대한 관심도가 점점 높아지며 버니 샌더스, 오카시오 코르테스와 같은 진보 정치인들이 큰 호응을 이끌었고, 현재에도 미국 언론들은 이른바 ‘젠지(Gen Z, Z세대)’의 사회주의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이제는 자국의 대외 정책까지 비판하며 제국주의 모순에도 조금씩 눈을 뜨고 있다.
“제국주의자들이 문제입니다. 인도적으로, 도덕적으로 생각하는 수백만의 사람들을 위해 나라를 굴려가는 것은 결국 민중들이고요.”
올 1월 미국 공영방송 PBS 인터뷰에 응한 한 대학생의 발언에서 이 같은 흐름을 읽을 수 있다.
3) 여전히 이스라엘 지지 고수하는 미 정치권
상황이 이토록 심각함에도 미국 정치권은 여전히 반전시위 강경 진압과 대이스라엘 지원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현지 시각 5월 2일, 바이든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브리핑을 열며 청년·학생들의 반전시위를 두고 “기물 파손, 무단 침입, 창문을 깨고 캠퍼스를 폐쇄하며 수업과 졸업식을 취소하게 하는 행위들 어떠한 것도 평화로운 시위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현재 대학가에서 이루어지는 반전시위를 ‘폭력시위’로 규정했으며, “폭력적인 시위는 보호받지 못하고 평화 시위만 보호받는다”라며 반전시위에 대한 강경 조치를 예고했다. 중동정책을 재고할 수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아니다”라고 일축하며, 대이스라엘 지원을 계속할 것임을 밝히기도 했다.
장-피에르 백악관 대변인은 대학 당국의 반전시위 참가자 정학 조치에 맞서 학교 본관 점거 농성을 벌인 컬럼비아대 학생들을 향해 “건물 점거는 평화적 방법이 아니다”라며 컬럼비아대 학생들의 시위를 폭력적인 소수 학생이 유발하는 혼란으로 규정했다.
공화당에 비해 이른바 ‘인권 친화적’이라고 평가되던 미국 민주당 정부의 이 같은 행보에 다가오는 11월 대선을 두고 청년층의 바이든-트럼프 간 지지율 격차가 좁혀지는 등 미국 청년·학생들의 민주당에 대한 배신감은 투표에까지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현재 미국 전역의 최소 40여 개 대학에서 반전시위가 진행되고 있으며, 지금까지 연행된 이들은 약 2,200명에 달한다. 컬럼비아대 점거 농성 진압에 투입된 경찰은 실탄을 발포하기도 했으며, 컬럼비아대 당국은 시위 참가 학생들에게 정학 및 퇴학 조치를 예고했다.
텍사스대에는 기마경찰까지 투입되었으며, 조지아주 에머리대에서는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고무탄과 테이저건을 사용하기도 했다. 캘리포니아주립대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에서는 ‘맞불시위’를 벌이던 친이스라엘 시위대가 팔레스타인 연대 농성 중이던 학생들을 향해 둔기를 휘두르고 폭죽을 쏘면서 시위대 간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는데, 이후 캠퍼스에 투입된 경찰은 반전시위 농성장만을 철거했다. 연방정부를 비롯한 주류 정치권이 반전시위 강경 진압을 선동하고, 이에 경찰이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면서 청년·학생들의 분노는 더욱 커지고 있다.
미국 청년·학생들의 반전시위 물결이 프랑스, 영국 등 서방 국가 곳곳으로 퍼지고 있는 가운데, 향후 서방 정치권 내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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